'저주토끼'로 부커상 최종후보 올랐던 정보라
단편 7개 엮은 소설집 '여자들의 왕' 출간
"치열한 여성의 환상적 이야기들 담아"
많은 장르문학 작가들 더 알려지길 바라
"'저주토끼'가 부커상 후보에 오르면서 갑자기 환상·SF 문학에 여러 관심이 쏟아졌습니다. 마치 저 혼자밖에 없는 것처럼요. 일단 그런 관심이 너무 '틀렸어요.'"
지난 4월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후보에 정보라의 '저주토끼'가 선정됐다는 소식에 떠들썩했다. 2017년 국내 발간 당시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장르소설이었다. 30일 만난 정보라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재조명한 그 관심을 반기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틀렸다"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보다 더 큰 관심을 받아야 할 좋은 동료 작가들이 많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정소연, 정세랑, 배명훈, 구병모, 김보영 등 몇년 전부터 계속 작품이 번역된 분들도 많다"며 "진짜 든든하고 굉장한 분들이 SF문학을 이끌어가고 있는데 영국에서 상을 줄 수도 있다니까 관심이 거기에 쏠리더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본보 기사 "변기에서 머리 나오는 얘기를 누가 싫어하겠어요?" 참고)
최근 문예지 '현대문학'(7·8월호)의 장르문학 특집에 스페셜 에디터로 참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신도 단편('통역') 하나를 선보였고, 함께할 19명의 작가를 직접 섭외했다. 이 기획을 성사시켜야겠다는 절박함으로 일했다.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대표직도 맡고 있는 그는 권위 있는 문예지를 통해 동료 작가들을 "자랑하고 싶었다"고 했다. "SF 관련 문학상은 등단으로 인정도 잘 안해줘요. 가령 2014년부터 9년째 하는 'SF어워드'는 '국립'인 과천과학관이 주최하는데도 그래요. 과학관 입장에서도 슬플 것 같아요." 뾰족한 농담에는 장르 문학에 대한 애정이 깔려 있다.
순문학과 참여문학이 대립하던 시절 장르문학은 천대받는 들러리 신세였지만 시대는 변했다. 군사 독재도 검열도 없고 참여문학은 시들하다. 이제는 장르문학이 소수자 인권을 얘기하고 진보적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게 정 작가의 생각이다. 대중성이 핵심인 장르문학은 사회 흐름 혹은 변화를 읽어야 살아남으니까 진보적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의 신작 '여자들의 왕'도 달라진 사회 변화를 담았다. 수록 작품은 2008년('잃어버린 연대기')부터 2019년('여자들의 왕')까지 10년 넘게 쌓아온 단편 소설 7개로, 모두 여성 주인공이 판타지적 상상력이 듬뿍 담긴 이야기를 끌고 간다. 주로 남성의 영역이었던 판타지·모험 소설의 화자를 바꿔 놓은 것이다. 기사가 용에게 납치된 공주를 구하는 전형적 서양 판타지를, 칼을 든 공주가 기사를 내쫓는 식으로 변주한 것이 흥미롭다. '저주토끼' 등 전작과 비슷한 매력도 있다. 이번에도 괴이한 상황 속 인물이 느끼는 외로움과 고립감, 허무함 등을 세밀하게 표현해 냈다.
그는 자신을 '화난 아시안 여성(Angry asian women)'이라고 묘사했다. 부조리에 분노하고 부정한 인물을 벌하고 싶다는 욕망이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번 소설집 마지막 작품인 '어두운 입맞춤'은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 속 가정폭력과 여성혐오를 뒤집어 보자는 생각에서 시작됐다. 여성 주인공을 흡혈귀로 설정한 것도 '그렇게 아내를 때리다 아내에게 물리면 어떻게 될까'를 상상한 결과다. 그런가 하면 우즈베키스탄 여행 후 쓴 '사막의 빛'은 9·11 테러 이후 무슬림을 '마술적인 악마'처럼 표현하던 편견을 깨보려는 시도다. 작가가 본 실크로드 상인의 후예이자 이슬람교도인 중앙아시아인의 문화는 매우 실용적이고 사람과 만남을 즐기고 유머로 충만했다. 그 풍경을 그리스도교 여자 아이의 눈을 통해 전하는 작품이다.
인터뷰가 끝날 때쯤 그래도 부커상 후보 경력은 작가의 삶에 의미가 있지 않을까 궁금했다. 정 작가는 "영향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단호히 답했다. 칸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이 어떤 의미로 작동하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에 "전혀 작동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답한 배우 송강호가 떠올랐다. 작가로서 하던 대로 변함없이 살아가겠다는 의지일까. 올해부터 강단에서 내려와 전업 작가가 된 그는 확 바뀐 일상으로 오히려 길을 잃은 듯해 고민이 크다고 했다. 그래도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 그는 폴란드 SF거장 스타니스와프 렘의 작품과 다른 폴란드 작가의 좀비소설 번역 일을 올해 안에 마무리 지을 계획이다. 결혼 후 터를 잡은 포항을 배경으로 해양생물이 나오는 소설도 써내려가고 있다. 부커상 대신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따로 있다. ""과학소설작가연대 대표로 할 말은 아닐지 모르지만, 언제나 저의 희망은 끝내주게 무서운 공포 소설을 쓰는 거예요. 새롭게 무섭기가 진짜 힘들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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