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4년간 79개 프로젝트 활동 살펴봤더니
②'여성' '페미' 단어 들어가면 '성별 갈등' 조장?
③남초 커뮤니티 주장 확산하는 집권당 정치
편집자주
한국일보 허스펙티브의 '페:트체크'는 페미니즘 관점을 더한 신개념 팩트체크 코너입니다. 젠더 렌즈를 통해 팩트의 사각지대를 밝힙니다.
"여가부의 세금낭비성 사업을 살펴 조치를 취하겠다."
여당 원내대표가 1년 예산 4억5,000만 원짜리 여성가족부 사업을 직격했다. 지난 4일,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페이스북에 '성평등 문화 추진단 버터나이프 크루(이하 버터나이프 크루)'를 겨냥해 "여가부 장관과 통화하여 해당 사업에 대한 문제점을 전달했다"고 썼다. '실세 중의 실세'인 권 원내대표의 한마디에, 여가부는 하루 만에 해당 사업을 '전면 재검토한다'고 밝혔다. 성평등 문화 확산과 청년의 마음 돌봄 등을 주제로 활동을 펼쳐온 참가자들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2019년 시작된 버터나이프 크루는 청년 스스로 성평등 문화를 만들어가기 위해 고민하고 제안하는 모둠 활동이다. △성평등 문화 확산 △젠더 갈등 완화 △공정한 청년 일자리 환경 조성 △청년 고립・우울감 극복을 위한 마음돌봄 등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청년 3명 이상이 모인 팀에 100만~600만 원 상당의 지원금을 제공한다. 올해 모집한 4기 출범식은 지난달 30일에 열렸다.
권 원내대표는 해당 사업이 '①문화 개선에 실효성이 없다 ②지원 대상이 페미니즘에 경도됐다 ③특정 이념을 국가가 지원해서는 안 된다 ④전 정부 사업 방식을 관성적으로 반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버터나이프 크루에 선발된 일부 단체의 활동 목표가 '여성'이나 '페미니즘'과 관련 있다는 이유로 "남녀갈등을 증폭하고 있다"며 낙인찍은 것이다.
실제 청년들은 어떤 활동을 했을까
한국일보 허스펙티브는 권 원내대표의 주장이 사실인지 4년 동안 버터나이프 크루 활동으로 선정된 79개 프로젝트를 살펴봤다. 여가부는 버터나이프 크루 홈페이지와 보도자료 등을 통해 전체 활동을 공개하고 있다.
예컨대 2019년 현직 약사 청년으로 구성된 '약먹을시간' 팀은 피임약 인식 개선 캠페인 '아는 것이 약이다'를 진행하며, 피임약에 대한 오해와 거부감을 해소하는 콘텐츠를 제작했다. 오프라인 행사를 열어 청년들이 피임약과 건강 관련 균형 잡힌 시각을 갖도록 돕는 활동을 했다.
같은 해 프로젝트 '평행 워크 평등하고 행복한'은 일과 가정을 병행하는 청년 맞벌이 부부를 위한 일-가정 양립과 자녀 육아에서 부부간 상호작용을 돕는 교육콘텐츠를 제작하는 내용이다. 버터스푼 팀은 '청년 성건강 알림 프로젝트'를 통해 청년들이 자신의 몸과 건강에 대해 책임 의식을 갖고 산부인과나 비뇨기과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왔다.
남성들이 주축이 된 성평등 활동도 있었다. 지난해 '프로젝트퀘스천' 팀은 아빠의 슬기로운 육아 생활과 성평등 가정을 위한 교육 콘텐츠를 제작했다. 온라인 음성 플랫폼에서 육아 강연회를 진행하거나, 인식 개선을 위한 웹툰을 제작한 것이 일례다. 올해 4기로 선발된 '성평등을 위한 디딤돌 만들기' 프로젝트는 남성과 함께하는 독서 토론 모임을 진행할 계획이었다.
청년들이 성별과 관계 없이 공유주방에 모여 음식을 나눠 먹으며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자는 취지로 진행된 '미미한 청년들 우리 모두의 밥상' 프로젝트를 진행한 한국청년거버넌스 관계자는 "남자로서 여성을 모르고 여성은 반대로 남성을 모르는 것 같아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홈페이지에 활동 후기를 남겼다. 여가부 관계자는 6일 한국일보와 통화에서 "기본적으로 버터나이프 크루는 모든 성별에 제한 없이 열려 있다"고 설명했다.
'여성' '페미' 들어가면 남녀 갈등?
물론 버터나이프 크루는 성평등 주관 부처인 여가부의 사업이다 보니 '여성' 혹은 '페미니즘'이 포함된 활동이 주를 이룬다. 1기는 18개 중 9개, 2기는 23개 중 21개, 3기는 21개 중 15개, 4기는 17개 중 9개의 활동 내용이나 기획 취지 등에 구체적으로 '여성' '페미니즘' 을 적시했다.
하지만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권 원내대표가 '남녀 갈등의 원인인 과도한 페미니즘' '관제 이데올로기'라 강하게 표현하며 비판한 바와는 거리가 있다. △여성의 경력단절을 막고 커리어를 가꾸는 활동 △여성과 청년의 주거 환경 개선 프로젝트 △지역 여성들의 연대와 자립을 돕는 모임 △영화·음악 등 대중문화의 다양성을 제고하는 활동 등으로 설명되는 다수 프로젝트는 성평등을 지향하려는 취지를 홈페이지에 정확히 내세우고 있다.
'언니차 프로젝트'는 흔히 남성의 영역으로 간주되는 운전에 있어 여성 접근성을 제고하는 활동을 하는 팀이다. 2년 전 버터나이프 크루 지원을 받아 '경정비 클래스'를 진행했다. 이연지(37) 대표는 "많은 여성이 운전이나 자동차에 대한 정보를 얻기 어려워하는데, 이 사업을 통해 경정비와 교통사고 대응법 등을 정확하게 알게 됐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며 "이를 이데올로기라 표현하는 것은 성평등 자체를 위험하고 불순한 것으로 인식하는 시대 역행적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여성 중심 스타트업 커뮤니티를 표방하는 '스여일삶'은 지난해 여성 리더십 현황을 조사했고, 올해는 스타트업 내 성폭력·성희롱 관련 가이드를 제작하고 발표회를 할 예정이다.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역차별'로 보일 수 있지만, 여성 법인 창업 비율이 26.8%(2019년 정부 자료)에 불과한 현실을 고려하면 창업 생태계의 성평등에 기여하는 활동이 아니라고 보기 어렵다.
4기 선발 후 돌연 사업 전면 재검토 소식을 들은 김하늬(35) 우먼스베이스캠프 운영자는 "버터나이프 크루 4기로 선정돼 여성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아웃도어를 더 많이 경험하도록 준비하고 있었는데, 정치적 이유로 지원이 전면 재검토된다는 소식을 접해 황당하다"고 말했다.
'남초 커뮤니티' 확성기 역할하는 집권 여당
논란의 시작은 이번에도 '남초 커뮤니티'였다. 반페미니즘 성향의 온라인 커뮤니티 '에펨코리아'에서 버터나이프 크루에 대한 언급은 지난해 한두 건 수준으로 미미했으나, 지난달 30일 4기 출범식 보도자료를 여가부가 배포하자 관련 언급과 비판이 크게 확산했다.
그러자 박민영 국민의힘 대변인은 1일 페이스북에 버터나이프 크루를 언급하며 "전 정부 때 확정돼 예산이 편성된 사업으로 부득이 추진됐고, 내년부터 폐지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대내적 활동에 국한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고 밝혔다. 남초 커뮤니티의 반발에 근거해 여당 대변인이 정부부처 정책 방향성을 제시하고, 원내대표는 무비판적으로 이를 수용한 형국이다.
'윤핵관(윤석열 핵심 관계자)' 여당 원내대표의 전화 한 통에 납작 엎드린 여가부는, 이번에도 존재 가치를 증명해내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황연주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사무국장은 "집권 여당이 남초 커뮤니티의 주장을 근거로 정책 폐지 수순에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남녀 갈등을 증폭시키고 특정 이념에 경도된 것"이라며 "권 원내대표 한마디에 부처 사업을 뒤집은 여가부 장관 역시 본래 역할을 해낼 의지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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