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지표 집무실 내걸고 왜 문제인지 몰라
행정기관 자처 스스로 정치적 중립도 부정
정체성 잃은 감사원 차라리 행안위 옮겨야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감사원장 집무실을 방문한 한 인사는 끔찍했다는 말부터 꺼냈다. 그를 부르르 떨게 한 건 최재해 감사원장 책상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떡 하니 걸린 표구된 국정지표였다. 자신의 의아한 표정에도 이게 왜 위험한지 인식조차 없는 원장의 모습에선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원장 집무실에 대통령 국정지표를 걸어 놓고 일하는 감사원, 이런 감사원을 상상하기 힘든 데는 이유가 있다.
감사원은 법률이 아닌 헌법에 규정된 독립기관이다. 대통령에 소속돼 있지만 직무에 관해서는 대통령도 간섭할 수 없는데 그 수장이 국정지표를 머리에 이고 직무를 수행할 순 없는 일이다. 국정지표는 엄밀히 말해 대통령 국정철학을 실행하는 행정 방향이자 목표다. 감사원은 오히려 이런 국정지표가 법의 테두리에서 수행되는지 견제하는 게 제 역할이다. 정권 시어머니 격인 감사원장이 국정지표를 챙긴다면 감사원을 일개 행정기관으로 전락시키는 것일 수밖에 없다.
국정지표 문제를 단순 실수로 치부하기 어려운 이유는 최 원장의 국회 발언이다. 지난달 말 국회 법사위에서 그는 “감사원이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지원하는 기관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감사원의 생명인 정치적 중립성을 스스로 부정하고 포기한 발언에 놀라지 않은 이가 없었다. 국민의힘 소속 김도읍 법사위원장조차 귀를 의심하며 발언을 수정할 기회까지 주었지만 그는 이번에도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했다.
감사원은 대통령, 권력 바라기가 아니라 그 직무가 우선이다. 직무 우선은 감사원법에 직무에 관하여 독립의 지위를 가진다는 조항을 둔 것처럼 법으로 규정한 엄중한 의무다. 대통령 국정운영에 영향을 받지 말고 독립적으로 직무를 수행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정권의 심기를 건드리고 정권에 불리한 감사를 마다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감사원장 역할은 국정운영 지원이 아니라 정치적 외압에서 감사를 지켜내는 데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전임 감사원장이 문재인 정부의 국정 상징인 탈원전 정책의 적절성을 감사한 게 좋은 예다.
공무원의 영혼이 가장 흔들리는 게 권력 힘이 가장 센 정권 초라고 하니 최 원장 행태에 일견 이해할 구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기관에서든 수장 지위에 올랐다면 누구보다 조직의 정체성에 맞게 일해야 한다. 전임 최재형 원장의 경우도 이런 정체성에 맞게 일해 여론의 지지를 받은 것이다. 그 과실을 정치와 맞바꾼 것은 잘못이나 그는 당시 여권 압박에도 불구하고 핵심 국정과제에 대해 정권에 불리한 감사 결과를 주저 없이 내놓았다.
정치에 뛰어든 전임자에 대한 반성으로 내부 발탁된 최 원장에 대한 기대는 사실 어느 때보다 높았다. 하지만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망정 조직 정체성마저 흔드는 실망스러운 사태는 반복되고 있다. 최 원장은 전 정권 시절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문제를 감사한 유병호 당시 국장을 비감사 부서로 인사하는 등의 조치로 독립성 침해 논란을 자초했었다. 정권 교체 이후 변모도 그렇지만 사무총장으로 승진한 유 총장에 끌려 다니는 그의 모습은 보기에도 민망하다.
최 원장의 감사원에선 인수위 업무보고가 이뤄졌고 사무총장은 안건과 무관하게 국무회의에도 배석하고 있다. 행정부를 감찰해야 할 독립기관으로서 부적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첫 내부 승진 원장이 이렇다면 지금껏 감사가 어떻게 이뤄졌고 3년여 남은 임기 동안 감사원은 또 얼마나 사람을 놀라게 할지 걱정스럽다. 국정지표나 챙기고 국정운영을 지원하는 감사원이라면 소속 국회 상임위도 법사위가 아니라 행안위로 옮기는 게 적절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최 원장은 ‘감사원의 핵심 가치는 직무상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이라고 한 취임사를 되돌아보기 바란다. 최 원장이 집무실에 걸어 놓았다는 국정지표의 첫 줄은 ‘상식이 회복된 반듯한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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