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아픈 몸과 달리기
편집자주
강소희 작가, 서효인 시인이 스포츠로 풀어내는 세상 이야기. 스포츠에 열광하는 두 필자의 시점에서 이 시대의 스포츠를 응원하고 지적합니다.
마침내, 코로나19에 걸렸다. 확진 결과가 나왔을 때 목구멍을 찢는 기침과 함께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며칠 동안 그토록 머리가 아프고 근육이 쑤시고 피곤한데도 그걸 코로나 증상이라고 짐작도 하지 못했다는 게 웃기고 슬펐다. 건강한 몸을 가진 기억이 너무 멀어서, 그렇게 아픈 몸을 기본값으로 산 지 오래된 나는 어느새 아파도 아픈 걸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30도를 오르내리는 여름밤에 다리가 오들오들 떨리는 오한이 들 때야 ‘혹시…이거 코로나?’라는 한 가닥 의심을 품었다.
최고 온도로 맞춘 전기장판과 겨울 이불 사이에 몸을 끼워 넣은 나는, 내가 형사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둔한 형사라면 정년퇴직할 때까지 단 한 명의 범인도 검거하지 못할 것이다. 설령 어쩌다 운이 좋아 범인을 알게 된다고 해도 범인을 쫓아 굽이굽이 좁은 골목길을 달리고 108계단을 오르고 지붕에서 뛰어내리기 전에, 잠복 단계에서 이미 어깨 통증으로 퇴각하고야 말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두어 달 동안 나는 내 몸을 쇠고랑처럼 질질 끌고 다니며 살았다. 목과 어깨에 귀신이 올라탄 듯 쑤시고 저렸다. 견딜 수 없이 아프거나 견딜 만큼 아프거나. 둘 중 하나인 나날이었다. 물리치료, 재활치료, 추나치료 등 많은 것들을 했고 절망했다. ‘올드보이’의 오대수처럼 살면서 내 몸에 지은 죄를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너무 많았다. 그래서 어떤 놈이 나를 이렇게 만든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픈 몸에 갇히다
오대수가 생고생 끝에 밝혀낸 그의 죄는 조금 허무할 지경이다. 오대수는 그저 언제나처럼 쾌활하게 친구와 수다를 떨었을 뿐이었다. 생각이 짧은 타입이지만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허다하다. 고작 그런 걸로 15년 동안 가둬진 채 만두만 먹는 극형에 처해지다니. 너무하고 너무하다. 오대수라고 일이 그렇게 될 줄 알았겠나? 딱히 편들고 싶은 캐릭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렇게 오대수에게 기울어지는 건 ‘딱히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그렇게 해버린 일들이 너무 많은 인간’에게 가지는 동병상련 같은 거다. 내가 지금 시달리고 있는 이 통증은 딱히 그러려고 그랬던 건 아닌 내 수많은 날, 즉 나의 아무 생각 없는 사소한 결정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사설 감옥에 갇혀버린 오대수처럼, 나는 아픈 몸에 갇혀버렸다. 하지만 나는 감옥에서 트레이닝하던 오대수처럼, 자꾸 아픈 몸으로도 뭔가를 해보려고 했다. 이를테면 국가 대표 출신에게 받는 러닝 수업 같은 거다. SNS로 꾸준히 러닝 인증을 하는 지인에게 비결을 물었더니 러닝 수업을 받았다고 하여 나도 날름 수업에 등록했다. 수업만 받으면 나도 그처럼 꾸준히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달리기 수업에서 배운 것들
여름철 달리기를 위한 최적의 시간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정오에 첫 번째 수업을 받았다. 야외에 서 있는 것도 부적절한 시간대에 과연 달릴 수 있을까란 염려와는 달리 나는 의외로 곧잘 달렸다. 먼저 준비 운동을 20분 동안 했다. 농구나 풋살을 할 때 준비 운동 중 하나로 달리기를 해왔던 나로서는 달리기를 위한 준비 운동이라는 개념이 새로웠다. 공들여 몸을 풀어주고 나서 달릴 때의 느낌은 그 전날 마구잡이로 달려본 것과 완전히 달랐다. 기름칠이 잘 된 자전거를 타는 느낌이었다. 달릴 때 내 오른발이 바깥으로 돌아간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엄지발가락부터 새끼발가락까지 골고루 힘을 분배하고, 바닥에 그려진 라인을 오롯이 좇으며 오른발이 틀어지지 않게 주의하면서 달리니 전날 밤 느꼈던 발바닥과 발목 통증이 현저히 줄었다.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하는지, 팔치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 달리기는 그저 달리면 되는 운동인 줄만 알고 있었던 게 의아할 정도로 새로운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달리기를 자꾸 포기하게 된 이유가 처음부터 보폭을 늘려 빠르게 달리려고 하고 폐가 터질 만큼 멀리 가려고 욕심을 부린 데서 기인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무리를 하고 나면 ‘뭔가를 해낸 기분’이 들지만 내 몸은 그것을 즐거운 경험으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다시 하는 걸 주저하게 만든다. 시작하자마자 크고 빠른 성과를 얻으려고 드는 급한 성미가 자기 발을 걸고 있었던 셈이다. 작은 보폭으로 기분 좋을 만큼 적당히 달리고 돌아오는 것. 그렇게 해서 다음의 달리기를 기껍게 만들고, 지난번보다 조금 더 달리는 것. 그게 내가 배운 달리기를 시작하는 방법이었다.
잘해보려고 한 일이라고 잘 되는 건 아니다
마지막 수업에서는 전력 질주하는 법을 배웠다. 있는 힘껏 달려가 작은 보폭으로 돌아오는 인터벌 러닝 방식이었는데 작은 보폭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내가 바람을 일으키는 말처럼 달리고 있다는 감각이(큰 착각이다) 온몸을 휘감았다. 나는 이제 작은 보폭과 큰 보폭으로 나만의 속도와 기록을 만들어 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큰 착각이었다). 다음 날, 어깨와 허리에서 잔잔한 통증이 느껴졌다. 자고로 운동이란 근육통을 남기는 법이지 하고 가볍게 넘겼다. 며칠이 지나도록 통증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진해져 갔다. 꼬리뼈가 쪼개질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질 때야 정형외과에 간 나는 어깨와 허리에 염증이 생겼다는 얘기를 들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러닝 수업이란 내가 잘해보려고 한 일이고, 잘 해냈다고 여긴 일인데 전혀 아니었다. 수업 내용 자체는 훌륭했지만, 그날 나는 전력 질주를 해서는 아니 되었다. 짧은 기간에 바닥을 기던 체력이 급상승했을 리도 없는 데다 전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상태에서 ‘잘하는 것 같은 기분’에 취해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젊음의 보증 기간은 끝났다
전력 질주를 하면 안 될 때 전력 질주를 해버린 것은 그저 내가 한 수많은 잘못된 결정 중 하나일 뿐이다. 나는 오랫동안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되는 대로 먹거나 먹지 않았다. 슛 정확도를 올리겠다고 삐걱거리는 어깨로 매일 밤 농구 코트를 다녔다. 잠도 제대로 잤을 리 만무하다. 왜 그랬냐고 묻는다면 나는 한때 젊었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사실 몇 해 전부터 몸은 깜박거리며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위염으로, 디스크 팽륜으로, 어깨충돌증후군으로…그러나 가끔 아프다가 원래로 돌아가는 젊음만 누리던 나는 알지 못했다. 아무렇게나 몸을 써도 알아서 기능하던 젊음의 보증 기간이 끝나가고 있었다는 것을. 아프지 않은 날이 드문 ‘더 이상 젊지 아니한 날들’이 나를 향해 전력질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통증은 나를 돕기 위해 생겨났다
흥미로운 사람을 만나 밤을 새우며 그를 탐색하는 일도, 고주망태가 되어 정상 범주를 벗어난 즐거움을 맛보는 일도, 회사 커피 머신에서 내린 라떼에 설탕 두 알을 넣어 먹는 일도, 친구들과 약속을 잡고 공연을 보러 가는 일도 더 이상 마음껏 할 수 없다. 의료사회학자 아서 프랭크는 ‘아픈 몸을 살다’라는 투병 에세이에서 질병이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프게 되면 관계에도 직업에도 변화가 온다. 자신이 누구며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삶이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도 다르게 느낀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무섭다. 심하게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된 두 번의 경험에서 나는 변화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압도되었다.’
심장마비와 암을 차례로 겪은 그에게 비할 바는 아니지만 작은 이빨로 기둥을 갉아 종내에는 집을 무너트리는 쥐처럼, 잔잔하고 지속적인 어깨 통증이 삶을 갉아먹고 있다는 기분에 휩싸인 내게 아서 프랭크는 이런 조언을 건넨다. ‘통증은 원래 나를 돕기 위해 생겨났다. 무언가가 바뀌어야 한다고 집요하게 주장하는 내 몸, 그것이 바로 통증이다.’
통증은 한눈팔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더 이상 그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서서히 어깨 저리게 알아가고 있다. 천둥이 쳤다. 나는 문득 밖으로 나가서 달렸다. 눈에 빗물이 들어왔다. 체열에 데워진 빗물이 귓바퀴를 타고 목덜미로 흘렀다. 말이 달리기지 사실 걷기와 다름없는 속도였다. 더도 덜도 없이 지금의 내게 딱 알맞은 속도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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