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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 감상에도 취향은 가능한가

입력
2022.09.21 04:3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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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모차르트·쇼팽다운 연주' 선호되는 현실
음악 해석의 보편성뿐 아니라 개성도 존중돼야

편집자주

20여 년간 공연 기획과 음악에 대한 글쓰기를 해 온 이지영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이 클래식 음악 무대 옆에서의 경험과 무대 밑에서 느꼈던 감정을 독자 여러분에게 친구처럼 편안하게 전합니다.

피아니스트 루돌프 부흐빈더와 임윤찬. 많은 음악팬이 거장의 새로운 음악 해석은 신선하게 받아들이는 반면 젊은 연주자의 독특한 해석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보편성의 함정'에 빠지곤 한다. ⓒMarco Borggreve·연합뉴스

피아니스트 루돌프 부흐빈더와 임윤찬. 많은 음악팬이 거장의 새로운 음악 해석은 신선하게 받아들이는 반면 젊은 연주자의 독특한 해석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보편성의 함정'에 빠지곤 한다. ⓒMarco Borggreve·연합뉴스

클래식 명곡의 연주가 담긴 음반과 영상은 귀한 기록 자료가 돼 지금도 수많은 연주자와 감상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연주자별로 스타일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작곡가가 악보에 남긴 악상을 따르다 보면 암묵적으로 지켜내야 하는 작품마다의 특징과 해석 범위가 존재한다. 소위 ‘베토벤답다’ ‘쇼팽처럼 연주했다’ ‘모차르트 스타일이다’라는 식의 감상은 이러한 특징을 반영한 얘기일 것이다.

그런데 보편적 해석을 따른 연주만 좋은 음악일까. 폴란드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이 2003년 첫 내한 공연 때 연주한 베토벤 소나타는 ‘베토벤을 쇼팽처럼 쳤다’는 말이 돌 정도로 가볍고 유려한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그날 연주는 누가 뭐래도 지금까지 손에 꼽는 호연이었다. 오스트리아 출신 피아노 거장 루돌프 부흐빈더의 지난해 10월 베토벤 소나타 공연도 예상되는 해석을 살짝 비틀어낸 연주였다. 노장의 재치 있는 선택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다름’이나 ‘새로움’이 만들어내는 재미만큼 특별한 것도 없다. 관람객이 작가의 작품 원본 자체를 감상하는 미술 분야와 달리 음악 감상은 작곡가의 악보를 해석한 연주자들의 실연을 경험하는 행위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천지창조’를 있는 그대로 재현했다 한들 그 결과물은 ‘천지창조’가 아니지만, 베토벤의 소나타는 연주자마다의 해석에 따라 무대 위에서 몇 번이고 다른 이야기가 된다. 심지어 같은 연주자라도 10년 전 해석과 엊그제 한 연주의 해석이 다르고 새롭게 표현될 수 있다.

요즘은 유튜브를 포함한 각종 미디어를 통해 명반으로 꼽는 음원, 연주 영상, 마스터 클래스를 쉽게 접하게 된다. 세상의 수많은 좋은 연주를 접할 수 있는 것은 분명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좋은 연주라는 평가를 받으려 보편적 해석을 따라 연주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말처럼 젊은 음악가들의 작품 해석이 비슷비슷해지는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검증된’ 거장들의 변칙이 재치로 느껴지는 것과 달리 젊은 연주자의 개성은 설득력을 얻기보다 비난의 대상이 되기 쉽다. 미디어 과잉 시대에 젊은 연주자들이 그런 비난을 얼마나 감내할 수 있을까. 연주자는 물론 감상자가 빠지기 쉬운 ‘보편성의 함정’이 여기에 있다.

오래전 한 젊은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프란츠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들었다. 연주가 좋았지만 전체적인 템포나 루바토(임의로 속도에 변화를 주는 것), 스타일 등이 같은 곡을 연주한 러시아의 전설적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1915~1997)의 해석과 많이 비슷했다. 3년 전 슈베르트 소나타 D.959를 연주한 모 피아니스트는 유명 피아니스트의 해석을 짜깁기한 것 같은 연주를 들려줬다. 선행 해석에 특허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도 모르게 비슷한 해석을 갖게 된 후대 연주자의 오리지널리티는 존중받을 수 있을까. 쉽게 추앙받고 싶어 보편성을 갖는 누군가의 해석을 그대로 재현해 연주하는 것은 괜찮은 것일까.

최근 몇 년간 젊은 연주자 A와 B의 무대를 찾아다닐 일이 있었다. 마침 비슷한 시기에 주목받던 두 피아니스트의 리사이틀이 있었고, 각자의 프로그램에는 베토벤 소나타 14번과 리스트의 곡이 포함돼 있었다. 같은 작곡가·작품이었지만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음악을 연주했다.

A의 베토벤은 처음부터 예상을 벗어났다. 바흐나 모차르트를 연주할 때처럼 또렷한 터치, 힘과 감정의 과잉 없는 베토벤은 담백하고 물 흐르듯이 신선했다. 위대한 우상이 아닌 인간적 대화가 오가는 베토벤 해석이 좋았고 묘하게 설득 당하니 기분도 좋았다. B의 관점 역시 남달랐지만 기본적으로 명확하게 짚어주지 않은 음정 때문에 선율이 매끄럽게 정리되지 않아 불편했다. 여기에 무게감과 감정까지 쌓으려고 하니 음악이 지저분해졌다. 두 사람 간의 차이는 리스트에서 확연히 부각됐다. 믿기지 않을 만큼 밀도 있는 연주를 들려줬던 A는 리스트의 긴 호흡과 서사가 얼마나 진지한 것인지, 리스트가 얼마나 대단한 작품을 썼는지 알려줬다. 반면 불명확한 선율 표현 위에 페달 사용으로 극적 효과를 부각시켰던 B는 리스트 작품이 폄하되는 이유를 알려준 셈이 됐다.

재미있는 것은 관객 반응이었다. A의 음악을 좋아하면서도 '어린 연주자의 베토벤이 저래도 괜찮냐'는 이야기를 나눴고, 뜻밖에도 B의 정리되지 않은 리스트에는 '뜨겁고 열정적인 리스트를 들었다'며 기립박수를 보냈다. 설득력 있는 베토벤과 리스트의 진지함을 끌어낸 A는 임윤찬이다. 지금은 수많은 관객이 그의 '새로운' 이야기에 귀를 열고 이끌리고 매료되고 있지만 절대 해석 앞에서 보편성에 기대게 되는 우리의 음악 취향은 참 연약한 것 같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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