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진정한 풋살러가 되는 길
편집자주
강소희 작가, 서효인 시인이 스포츠로 풀어내는 세상 이야기. 스포츠에 열광하는 두 필자의 시점에서 이 시대의 스포츠를 응원하고 지적합니다.
물에 젖은 채 아스팔트 바닥에 버려져 갈가리 찢어지는 휴지. 일요일 아침 대전 복합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내 몸이 그것과 같았다. 전날 서울에서 강릉으로 이동 후 두 시간도 못 잔 채 다시 새벽 7시 버스를 타고 세 시간 반을 달려 대전에 발을 디뎠을 때 스스로 목덜미를 잡고 벽에 밀어붙이고 물었다. 인간이 도대체 이게 무슨 미친 짓이야, 한 번 더 물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미친 짓이냐고. 그리고 또 물었다. 도대체가 너는 왜.
사랑은 풋살, 우정은 전국대회참가
나는 실토했다. 사랑과 우정을 지키고 싶었다고. 연이은 야근에 시달리는 흔한 연말의 회사원은 나날이 기온과 함께 뚝뚝 떨어지는 기운을 어찌하지 못하고 단지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힘이 모자라지만 사랑과 우정을 지키고 싶었다고. 내가 지구는 안 지켜봐서 잘은 모르겠지만 내 어깨는 소행성을 치우러 날아가는 슈퍼 히어로만큼 뻐근하지만, 아니 평소 근육 운동을 빼먹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히어로보다 기댈 데 없는 내 어깨가 더 뻐근할 게 틀림없지만, 사랑과 우정은 정말 소중한 거 아니냐고. 지금 내게 사랑은 풋살이고 우정은 풋살 대회 참가라고.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강릉 여행 도중 당일치기로 풋살 대회에 참가하러 대전에 가는 선택지 같은 건 떠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때도 정신이 똑바른 편은 아니지만 사랑에 빠지면 누가 봐도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무리한다. 사랑한다고 무리를 해야 하는 게 아니며 무리를 해야만 사랑이 아니라는 건 백 년 전부터 알고 있지만 그건 피곤할 때 케이크를 먹어봤자 몸에 더 안 좋다는 리빙 포인트를 아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어쩔 수 없다. 어깨가 바스러져도 나는 어쩔 수가 없다.
전국, 페미니스트 그리고 풋살
어쩔 수 없는 사랑으로 찢어진 휴지 조각이 된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제1회 민우풋살리그가 열리는 금강풋살장으로 갔다. 한국여성민우회 소속 활동가 영지씨는 ‘전국 여성민우회가 각 지역 민우회 풋살팀으로 활동하고 있는 페미니스트들이 한자리에 모여 민우회 회원이자 풋살팀 멤버로서의 동질감을 확인하고 서로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즐거운 기회를 마련하고자 했다’는 주최 측의 말을 전했다. 전국, 페미니스트 그리고 풋살.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그곳에는 광주여성민우회(FC 킥킥킥), 서울동북여성민우회(FC 해방), 춘천여성민우회(달빛축구단), 파주여성민우회(든든단단), 한국여성민우회(FC 호랑이)에 소속된 66명의 선수가 있었다.
서울, 광주, 춘천 등 전국에서 온 선수들이 빨강, 노랑, 연두, 보라로 제각각 도드라지며 무리 지어 있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들어가다가 주차장 옆에서 한창 연습 중인 우리 팀을 발견했다. 그들을 반가워할 새도 없이 돗자리에 누워버린 나는 곧 세수도 하지 못한 퍼석한 얼굴과 대충 눌러쓴 모자로 홍합처럼 갈라진 머리를 한 채 내가 최전방 공격수라는 얘기를 듣게 된다. 제가요? 네. 제가요? 네.
최전방 공격수라고요? 제가요?
내가 속한 팀 FC 호랑이는 약 두 달 전에 만들어졌다. 이름을 갖게 된 건 한 달 남짓이다. 춘천여성민우회 ‘달빛축구단’이 2020년에 결성된 것과 비교해보면 굉장히 짧은 역사를 가진 신생팀이다. 역사라는 말도 너무 길고 크다. 지난 9월 17일에 처음 만나 일곱 번의 훈련을 함께 한 우리는 이제 한 계절을 통과하고 있을 뿐이었다. 공 다루는 법과 패스하는 법부터 시작한 팀에서 포지션을 정해 연습을 했을 리가 만무하다. 그래서 대회에 나가기 전까지도 선수 대부분이 ‘공격이든 수비든 맡겨주시는 대로 할게요’에 가까운 상태였다. 원하는 포지션을 적어내라고 할 때 많이 뛰어다닐 자신이 없던 나는 공격수 칸에 체크하는 동시에‘ 상관없음 ’칸에도 체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머릿속에서 공격수란 항상 하던 대로 앞에 선 두 명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대회 당일 확인한 작전판에는 마름모꼴로 그려져 있었고 내 이름이 최전선에 놓여 있었다. 이렇게까지 심한 공격수를 하라고? 믿어주는 건 고맙지만…어떡하지, 어쩔 수 없다. 많은 일들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나고 흘러가듯이 이 또한 지나가리라. 어떻게 되리라.
리그전으로 진행된 예선전에서 총 네 번의 경기를 치렀다. 승점 계산 가이드를 보면서 승리 시 3점, 무승부 1점, 패배 시 0점인 것까지는 이해했지만 동점 시 승점→골득실→다득점 등으로 이어지는 계산은 내 영역이 아닌 것 같았다. 그저 열심히 뛰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 모자를 벗었다. 한나절 넘게 모자에 눌려 반쪽으로 쪼개진 머리를 너무 청아한 가을 햇볕 아래 80여 명의 사람들 앞에서 내놓고 싶지 않았지만 이길 수만 있다면 그 정도 부끄러움은 감수해야 했다. 경험상 모자를 쓴 채 경기하면 답답함으로 인해 경기력이 20% 정도 떨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모자를 벗었기 때문일까. FC 호랑이는 광주여성민우회 소속 FC 킥킥킥을 상대로 빠르게 선취점을 획득하고 기세를 이어 3대 0으로 가뿐하게 승리했다. 그중 두 개의 골을 성공시킨 나는 그날 내가 대전에서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을 포함해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일을 해냈다고, 도대체 어떻게 넣은 건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하여간 무승으로 돌아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안도하며 다시 돗자리에 누웠다.
우리 인생에 처음 일어난 일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 팀 FC 호랑이는 결선에 진출했고 승리했다. 예선에서 한 번 이기고 세 번 무승부가 나는 바람에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라고 인조 잔디를 털어내고 있을 때 신비로운 승점 계산으로 우리가 결선에 진출한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는 다 같이 얼싸안고 운동장을 돌았다. 빙빙 돌다가 버터가 되어버린 호랑이들처럼. 소리를 지르며 돌고 또 돌았다. 결선에서 다시 FC 킥킥킥을 만났다. 우리가 이미 이긴 팀이었기에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상대 팀이 한 골을 넣은 채로 전반전이 끝났다. 남은 시간은 6분. 놀랍게도 우리는 동점 골에 이어 역전 골까지 만들어냈다. 시합을 앞두고 종종 우리 이렇게 시작해서 이렇게 패스해서 이렇게 넣어버리자라며 연습했던 동료들과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누가 어떻게 넣었느냐고 묻는다면 사실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어쨌든 말이다. 우리 팀이 전국 대회에서 역전승했다는 말이다. 누군가 ‘내 인생에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라고 외쳤다. 내 인생에도 처음 일어난 일이었다.
진정한 풋살러가 되는 길
전국에서 온 선수들은 마치 선수단처럼 대절한 버스를 타고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나는 무려 최다 득점자에게 주는 ‘지소연상’을 수상한 선수였지만 그 사실을 아는 동료들이 떠난 후에는 그저 강릉행 버스를 타기 위해 세 시간여를 배회해야 하는 외지인일 뿐이었다. 뭘 해야 할까, 추위에 떨며 길을 걷던 나는 목욕탕에 가기로 결정했다. 낯선 도시에서 승리를 거머쥐고 목욕탕에서 피로를 푼다. 캬... 이로써 나는 진정한 풋살러로 거듭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한 건지 스스로 탄복하며 탈의를 마치고 벽에 붙은 메뉴판을 보며 오미자차와 레몬차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세신사가 내게 말했다. “얼른 들어가요. 30분 남았어.” 세상에, 나는 무려 풋살에 대한 사랑과 동료에 대한 우정으로, 서울에서 강릉에 갔다가 대전에 와서 너덜너덜한 몸으로 리그에 참가하여 기적적인 우승을 거머쥐고 최다 득점자에게 주는 지소연상까지 받은 사람인데 도대체 뭔 상관이란 말인가. 어쩔 수 없다. 사랑에서 파생된 고난에 순응하리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세신사는 내게 좀 미안했는지 등을 밀어주겠다고 했다. 거듭 거절하다가 결국 등을 내어주었다. 그의 거침없는 손길 속에 속절없이 흔들리면서 나는 비로소 진짜 풋살러가 되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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