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그림책으로 배운 스포츠
편집자주
강소희 작가, 서효인 시인이 스포츠로 풀어내는 세상 이야기. 스포츠에 열광하는 두 필자의 시점에서 이 시대의 스포츠를 응원하고 지적합니다.
2022년은 진부한 표현을 다시 한번 빌려 굳이 표현하자면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다사다난했다. 작년 이맘때 우리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역시나 진부하고 그러나 따뜻한 인사를 열심히 주고받았는데 많이 왔어야 할 복이 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마스크를 써야 했던 아이는 이제 3학년이 되는데 여전히 코로나 팬데믹의 세상에서 어린이의 시절을 보내는 중이다. 그 시간 동안 어른들이 한 일은 주로 편을 갈라 이죽대며 싸우는 일이었던 것 같다. 저열한 스포츠 도박에라도 빠진 양 진영 따라 갈가리 나뉘어 부득부득 이를 갈았던 한 해였다. 그렇다면 2023년은 과연 달라질까.
새해를 농구장에서 시작했다. 아이가 연말 어느 날 자기도 소리를 지르며 스트레스를 풀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 초등학교 2학년이 스트레스가 있어? 문득 떠오른 어리석은 의문을 침과 함께 꿀꺽 삼켰지만 녀석이라고 스트레스가 없을 일은 아니었다. 방학이면 주로 집에 있지만, 아파트에서는 뛰면 안 되고 너무 큰 소리도 내면 안 된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은 더 많아질 게 분명했다. 야외 활동을 하기에 이번 겨울의 추위는 꽤 매섭다. 그래서 선택한 농구장이었다. 바람을 막아주는 체육관, 키 크고 멋진 아저씨(?)들의 프로다운 플레이, 경기 내내 멈추지 않을 음악. 이런 조건들이 딸아이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겠지 싶었다. 거기서는 소리를 질러도 된다. 3점 슛이 들어가거나 덩크슛 같은 장면이 나오면 제자리에서 방방 뛰어도 상관없다. 그렇게 경기를 즐기다 딸과 스포츠 혹은 스포츠 관람이라는 취미를 공유하게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원대한 계획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아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편을 갈라 경쟁하는 스포츠 경기의 룰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1쿼터에는 홈팀이 어디고 원정팀이 어딘지 모르겠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왜 꼭 이겨야 하는 거냐고 반문하더니, 4쿼터에는 형편없이 지고 있는 홈팀에 적잖은 상처를 받고는 왜 지고 그러냐고 물었다. 1쿼터 시작할 즈음에는 원래 스포츠는 이겨야 하고 이겨야 재미있는 것이라 말했다가 4쿼터에 이르러서는 원래 스포츠는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는 것이라 설명했다. 이따위 설명이 나조차도 납득이 잘 안 되는 것이었다. 그날 홈팀의 경기력만큼 납득되지 않았다. 내가 너무 급했던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럴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좀 더 먼 길을 천천히 에두르는 방식으로 딸에게 스포츠를 알려주기로 했다. 우리가 함께 좋아한 그림책을 다시 꺼내어 보는 것이다.
나혜 그림책 ‘슛!’(2021)을 먼저 펼쳤다. 축구라면 카타르 월드컵 전반전을 같이 보다가 아이가 먼저 까무룩 잠이 든 경험이 있다. 아빠는 (나한테는 못 하게 하면서) 왜 소리를 지르냐고 통박을 맞았더랬다. 아직 축구가 주는 환희를 너는 모르지. 너는 2002년 월드컵은커녕 2013년에 태어난 풋내기에 불과하니까. ‘슛!’은 2013년생에 알맞은 ‘장난감’의 이야기다. 열한 개의 인형을 고정한 막대의 손잡이를 돌려 상대 골망을 노리는 테이블 축구의 그 장난감이다. 실제 축구와 달리 (장난감) 선수들은 각자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 선수가 ‘토이 스토리’의 한 장면처럼 막대를 박차고 나와 멋진 폼으로 오른발 슛을 넣는다. 이윽고 장난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미니 축구장을 휘젓는다. 그중 특히 인상적인 건 장난감이 모두 여성이었던 점이다. 나혜 작가가 표현한 축구하는 여성의 몸은 가히 역동적이었다. 축구장의 객체로서 관중석의 볼거리로서 몸이 아닌, 운동장의 주인으로서의 몸이 '슛!'에 있었다. 이러한 느낌은 책의 뒤표지에 표현된 반전에서 확신으로 바뀐다. ‘우리는 스포츠를 할 수 있다’. 성별과 피부색과 몸의 생김새나 장애 여부와 상관없이 그래야만 한다.
김영진 그림책 ‘야구장 가는 날’(2020)은 우리 가족의 상황과 경험에 조금 더 밀착한 작품이었다. 아이가 말하기를 아빠는 화를 안 내는 사람인데 예외가 있다고 한다. 물론 그 예외는 바로 야구를 볼 때다. 나도 내가 그렇다는 걸 잘 안다. 안 그래야 하는 것도 더 잘 안다. 이건 마치 야구선수가 안타 혹은 희생플라이를 쳐야 하는 걸 알면서도 당하는 삼진 혹은 땅볼 아웃과 비슷한 게 아닐까 싶다. '야구장 가는 날'의 아빠도 나와 같은 야구팬이다. 야구팬이라면 야구 보다가 화를 내는 게 당연하므로 그도 그렇게 한다. 아빠의 아들은 아직 야구팬이 아니므로 화를 내는 아빠를 이해할 수 없고 급기야 야구마저 싫어진다. 그 둘이 야구장을 가는 것이다. 확실히 야구장은 야구에 대한 각성 효과가 있다. 탁 트인 하늘과 관중석을 가득 채운 사람들과 청량한 잔디와 근사한 유니폼 같은 것들 앞에서 하루치 승부는 별 게 아닌 게 될 수도 있다. 텔레비전을 보며 인상이나 쓰는 것보단 야구장에 직접 가는 게 몇 배는 낫다. 하지만 1년에 그럴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될까. 책에서 아빠와 아들은 목말을 하고 경기장을 나오며 승부보다 더 즐거운 그 무엇을 이야기한다. 그 무엇이 있어야 스포츠다. 이기고 지는 것 그 이상의 특별함.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 ‘선’(2017)은 그야말로 선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극도로 아름다운 어떤 순간은 사람의 말이나 주변의 소음 같은 것들을 일시 정지하고는 하는데 내게는 김연아의 피겨스케이팅이 그랬다. 특히 ‘죽음의 무도’ 영상을 볼 때면 지금도 아이스링크를 수놓는 선수를 제외하고 세상에 아무도 없게 느껴지고, 기술에 대한 해설이나 감탄 같은 것도 조금은 거추장스럽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책은 연필과 지우개로 시작한다. 연필 선을 따라가니 빨간 모자를 쓴 소녀가 스케이트를 타고 있다. 소녀가 그리는 선은 점점 복잡해지더니 악보의 기호처럼 스스로 박자가 된다. 직선으로 뻗고 유연하게 휘고 둥글게 원을 그린다. 그리고 결정적인 기술에 들어갈 차례다. 트리플 악셀이었을까. 소녀는 착지에 실패하고 빨간 모자도 떨어뜨린다. 그리고 구겨지는 종이. 처음 연필과 지우개를 들었을 손에 구겨졌던 종이를 다시 펴자 거기엔 하얀 아이스링크가 아닌 숲속 호수 빙판이 나온다. 그곳의 얼음은 하얗지 않다. 도리어 연필로 옅게 칠한 듯 따스한 잿빛이다. 그리고 거기에 아이들이 있다. 그들은 넘어져도 괜찮다는 듯 빙판에서 그저 ‘논다’. 소녀는 빙판에서 노는 아이들의 무리에 함께함으로써 실패의 중압감을 벗어던지고, 혼자 감당해야 하는 압박감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그제야 진짜 아름다움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기고 지는 것을 넘어선 스포츠의 특별함은 바로 함께하는 즐거움이 아닐까.
아이는 농구장에 분명 실망했는데 다음에 다시 갈까 물으니 한 번 더 가본다고 한다. 다음 홈경기 일정을 검색해본다. 팀에는 최근 3점 슛에 물이 오르다 못해 넘쳐버린 가드 전성현 선수가 있다. 아이와 같은 선수를 응원해볼까. 내친김에 2023년 각종 스포츠 경기 일정표를 훑는다. 올해는 상암이나 탄천에서 축구를 보고 잠실이나 광주에서 야구를 봐야지. 여름에는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여자축구 월드컵이 열리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아이와 함께 응원해야겠다. 그것들에서 이기고 지는 일을 넘어선 특별함을 발견하고 싶다. 그 특별함으로 인해 아이가 지금의 어른들처럼 이기고 지는 일에 매몰되지 않을 힘을 갖게 된다면 좋겠다. 그것이, 2023년, 스포츠와 함께하는 새해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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