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윤상, 하루키와 함께 한 ‘달리기란 무엇인가’
편집자주
강소희 작가, 서효인 시인이 스포츠로 풀어내는 세상 이야기. 스포츠에 열광하는 두 필자의 시점에서 이 시대의 스포츠를 응원하고 지적합니다.
지겹나요? 네.
힘든가요? 네.
숨이 턱까지 찼나요? 네네.
할 수 없죠, 어차피 시작해 버린 것을. 네…
단 한 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진짜요?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
여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고 있는 12년 차 회사원이 있다. 이별 뒤엔 세상 모든 슬픈 노래가 자기 노래처럼 여겨지는 이치로 나는 ‘달리기’만 들으면 윤상이 내게 율무차를 건네며 어깨를 두드려 주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의 ‘단 한 가지 약속’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도 예측할 수 없는 불경기를 통과하는 현대인에게 조금 불길하게 들리지만 말이다. 회사원에게 끝이란 언제일까. 서로를 탐색하고 서로의 눈치를 보고 서로의 마음을 사고 싶어 했던 시절은 옛날에 지나간 오래된 연인처럼 나는 종종 회사와의 끝을 생각하면서도 그다음이 어떻게 될지 막막하고 두려워 생각을 그치곤 한다. 삶의 모퉁이를 돌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일 때 나는 책을 읽는다.
한 책을 두 번 이상 읽는 일은 거의 없다. 아는 이야기를 곱씹는 데서 큰 기쁨을 느끼지 못해서다. 하지만 어떤 책은 몇 년 주기로 꺼내어 읽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그 책이다. 스무 살 때 그의 소설을 읽고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흰 운동화에 대한 애호를 가졌고 재즈를 들었고 달리기를 선망하게 됐다. 그가 등단한 서른 살의 나이에 오랫동안 신경 썼다. 스무 살에서 서른 살까지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스물아홉 살이 됐고 나는 더 이상 등단을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웃어도 좋다. 나도 웃고 있다.) 그래서 1년 동안 글을 썼다. 나는 등단하지 못했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가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 읽었다.
스무 살에 처음 읽은 그의 소설은 끝을 알 수 없는 따뜻한 검은 우물에 빠져드는 듯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 놀라웠다. 더 놀라운 것은 읽고 나면 도무지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뭐가 좋았더라. 사람으로 치면 함께 있는 동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말도 잘 통하고 농담 코드도 잘 맞고 흥미롭고 즐거웠는데 헤어지고 나면 그래서 우리가 무슨 얘기를 했더라란 생각이 드는 그런 기분이었다. 좋은 감정은 확실한데 그게 왜 그렇게 된 건지는 모호해서 어쩐지 한 번 더 만나고 싶어지는 거다.
그의 에세이에도 그런 게 있다. 이천 쌀로 만든 젤라토처럼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사소하고 희미하고 미묘한 삶의 감각들을 잘도 잡아낸다. 그리하여 일주일에 60km씩 달리는 사람이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면 때때로 나 자신이 해변에 밀려온 한낱 나무토막에 지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라고 하면 일주일에 6km도 걸을까 말까 하는 나 같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결코 대작가에 비견할 만한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고 실제로 전혀 달리지 않지만, 인생이라는 달리기를 어쨌든 간에 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책에서 하루키는 달린다는 것은 운동인 동시에 유효한 메타포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매일매일 달리면서 또는 마라톤 경기를 거듭하면서 목표 달성의 기준치를 조금씩 높여가며 그것을 달성하는 데 따라 나 자신의 향상을 도모해 나갔다. 적어도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두고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해 매일매일 노력해왔다. 어제의 자신이 지닌 약점을 조금이라도 극복해나가는 것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장거리 달리기에 있어서 이겨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거의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달리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달리는 사람의 이야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자기 자신을 향상하고자 하는 마음과 실행을 엿보는 데서 오는 자극에 심취하는가 하면 달리는 게 언제나 즐거운 것은 아니라는 고백에서 느닷없는 동지애를 느낀다.
달리고 싶지만 달리기 싫은 사람을 위한 애증의 러닝 가이드 ‘나는 달리기가 싫어’는 ‘나는 달리기가 싫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문장 하나 때문에 이 책을 샀다고 해도 무방하다. 베테랑 마라토너인 작가조차도 달리러 나가는 게 싫다는데 나 같은 범인은 말해 무엇하냐의 심정인 것이다. 물론 그는 ‘영감 찾고 자시고 하는 사람은 아마추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무조건 나가서 일을 시작할 뿐이다’라는 화가 척 클로스의 말을 인용하며 그날의 기분이니 컨디션이니 다 제치고 나가서 단 몇 분이라도 달리는 게 낫다고 이야기하지만 말이다.
달리기에 대한 책을 읽는 것은 글쓰기에 대한 책을 읽는 것과 비슷하다. 이 책들을 읽는 사람은 누구인가. 달리면 좋을 것 같지만 달리지 않는 사람과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류의 책 좀 읽어본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다. 정말로 하고 싶다면 일단 나가서 달리는 것, 일단 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1km를 뛸 수 있다면 다음엔 2km를 뛸 수 있다고 한 문장을 써야 그다음 문장을 쓸 수 있다고.
내 직업은 카피라이터이다. 글을 잘 쓸 거라는 오해를 받는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내일은 체력왕’이라는 운동 에세이를 냈다. 스포츠에 대한 글을 잘 쓸 거라는 기대를 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오해와 기대가 있었기에 이 지면에 글을 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4주에 한 번 20매 분량의 원고를 쓴다는 건 굉장한 경험이었다. 글쓰기에 대한 책과 운동에 대한 책을 더 많이 사게 되는 일이었다. 때로는 썩 마음에 들었고 때로는 아무도 읽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대체로 절망스러웠다. ‘다음엔 좀 더 일찍 준비해서 마음에 쏙 드는 원고를 써야지!’라든가 ‘나도 밑줄 그어지는 문장 같은 걸 써보는 거야!’라고 마음먹어 보아도 매번 발등에 떨어진 불을 눈물로 끄며 한 글자씩 뱉어내기를 반복했다. 달리는 사람이 되고 싶으면 이렇든 저렇든 울며 신발 끈을 매더라도 밖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듯이, 쓰는 사람이 되고 싶으면 이랬든 저랬든 울며 한 글자씩 써야 했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종이를 찢어 먹고 싶을 만큼 잘 쓰는 작가를 보고 배가 아파 떼굴떼굴 언덕을 굴러 내려가는 날에는 그렇게 가장 낮은 곳에 도착한 날에는 하루키의 이 문장을 지팡이 삼아 일어나고 싶다.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 하나의 소중한 자산인 것이다. 마음이 받게 되는 아픈 상처는 그와 같은 인간의 자립성이 세계에 대해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당연한 대가인 것이다."
그렇게 대단한 문장이나 작품이 아니더라도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글을 써야 한다. 세상이 내게 그것을 요구해서가 아니라 그저 내가 되고 싶은 게 ‘쓰는 사람’이라면 그 수밖에는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다.
※ ‘강소희·서효인의 작전타임’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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