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동, 역대 최단기 주미대사 아그레망
文정부 이수혁 대사는 두 달 넘게 걸려
아그레망 받기 전에는 언론 보도 불가능
외교부 과민반응에 인사검증 소홀 지적
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역대 최단기 주미대사 아그레망 1주일’
조현동 신임 주미대사가 14일(현지시간) 부임했습니다. 지난달 29일 내정돼 미국으로 날아가기까지 불과 보름 정도 걸렸습니다. 특히 미 정부는 ‘외교사절을 파견할 때 상대국의 동의를 묻는 절차’인 아그레망을 1주일 만에 내줬습니다. 역대 주미대사 가운데 가장 빨랐습니다. 전례 없는 속전속결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국빈방문을 앞두고 미국으로서도 뜸을 들일 수는 없었을 겁니다. 26일 열릴 한미정상회담 준비과정에서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이 전격 사퇴하면서 그 자리에 조태용 전 주미대사가 투입되고 외교부 1차관이었던 조 대사가 주미대사로 긴급 지명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12년 만에 한국 대통령을 국빈으로 초청한 마당에 주미대사 자리가 비어 있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지요.
외교부에 따르면 과거 주미대사에 대한 미국 정부의 아그레망은 평균 4주~6주가량 걸렸습니다. 이전까지는 2012년 최영진 대사가 10일로 가장 빨랐고요. 2019년 이수혁 대사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명을 받은 지 두 달이 넘도록 아그레망을 받지 못해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한미관계에 이상 신호가 감지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 건데요. 일각에서는 우리나라가 일본에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를 통보하자 미국이 아그레망을 볼모로 불만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 아니냐는 관측이 무성했습니다. 2018년 우리 대법원의 일제 강제동원 피해배상 판결에 일본 정부가 보복성 수출규제 조치를 가하자 이에 우리 정부가 ‘지소미아 종료’ 카드를 꺼냈는데요. 한미일 군사협력에 공을 들여온 미국으로서는 탐탁지 않았겠지요. 이처럼 아그레망에 걸리는 시간은 통상 한미동맹의 수준을 보여주는 가늠자로 여겨집니다.
보수 정부에선 미일, 진보 정부에선 중국이 빨라
보수정부와 진보정부에서 주변국과의 아그레망에 차이가 있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미국과 일본의 경우 우리 정부가 보수성향일 때 한국대사에 대한 아그레망이 평균 10~20일 빨랐습니다. 반대로 진보정부에선 주중대사의 아그레망 절차가 상대적으로 신속하게 진행됐다는 분석도 있는데요. 대사 지명 당시 양국관계가 미묘하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아그레망은 상호주의 성격이 강해 통상 형식적 절차로 여겨집니다. 상대국에서 우리가 지명한 대사를 거부(페르소나 논 그라타)하거나 동의 절차에 필요 이상으로 많은 시간을 소요한다면 우리 역시 똑같이 앙갚음(?)하면 되기 때문이지요. 물론 현실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적용하기엔 한계도 있습니다.
에티오피아, 현직 대사 좋다고 후임자 아그레망 거부도
좀 더 시야를 넓혀볼까요. 1981년 에티오피아에서는 현지 주재 한국대사가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후임 대사에 대한 아그레망을 거부한 독특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정희택 주에티오피아 대사 후임으로 김득보 주이탈리아 공사를 내정하고 아그레망을 요청했는데요. 에티오피아가 “정 대사와 계속 일하고 싶다”며 김 내정자에 대한 아그레망을 거부한 겁니다. 양국 외교장관이 만나 정 대사의 임기 1년 연장을 결정할 정도로 에티오피아의 입장은 강경했다고 합니다. 약속한 1년이 지나서도 정 대사를 계속 붙잡으려 했던 에티오피아는 “내가 유임되면 영전할 기회를 잃는다”고 정 대사가 읍소한 끝에 후임자에 대한 아그레망 문서에 서명했다고 합니다.
2018년엔 해리 해리스 주한미대사 후임으로 지명된 빅터 차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가 우리 정부의 아그레망을 받고도 중도 낙마해 논란이 됐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이 그의 내정을 철회한 건데요.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이견을 보인 것이 원인이라는 언론보도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상대국의 아그레망을 받고도 낙마하는 사례는 극히 드문데요. 이 사태 이후 주한미국대사 지명은 차일피일 미뤄졌고, 지난해 7월 필립 골드버그 대사가 부임하기 전까지 1년 반 동안 자리를 비워 둬 이런저런 뒷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인사 내정돼도 아그레망 전까지 언론 보도 못해
외교부는 상대국의 부임 동의를 받기 전까지 내정 사실을 엠바고(보도유예)를 전제로 언론에 미리 설명해왔는데요. 매년 2, 3차례 공관장 인사를 앞두고 외교부에선 출입 기자단을 상대로 10~20여 명에 이르는 내정자를 한꺼번에 공개합니다. 명단은 아그레망 절차가 끝나고 대통령으로부터 정식 임명장을 받은 이후에야 보도할 수 있습니다. 자연히 내정자에 대한 언론의 검증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구조인 거지요. 상대국이 동의도 하지 않았는데 내정자 명단이 먼저 보도되는 건 외교적 결례라는 이유에서입니다.
다만 예외는 있습니다. 167개 공관장(주타이베이대표부 포함 시 168개) 가운데 장차관급 대우를 받는 4강 대사(미국·중국·일본·러시아)는 대통령실이 선제적으로 발표합니다. 대통령 인사권이 강하게 작용하는 상징적인 자리라 정무적 판단을 하는 겁니다. 외교당국 관계자는 “원칙적으로 아그레망을 받기 전에 발표하면 안 되지만 상대국도 우리 정부의 인사 관행을 이해한다”며 “물론 정부의 내정자 발표가 있기 전에 귀띔은 해준다”고 말했습니다. 주OECD(경제협력개발기구) 대사나 주유네스코 대사는 아그레망 절차가 필요 없습니다. 주권국가가 아닌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관장 인사에 대선 캠프 출신도 상당수 포진
그런데 이런 아그레망을 놓고 상대국이 아닌 우리 외교부가 과민하게 반응하며 스스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바람에 잡음이 일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는 공관장 내정자를 사전에 발표하는 외교부 출입기자단 브리핑이 갑자기 취소됐습니다. 외교부가 아그레망이 필요 없는 총영사직도 임명 전까지 보도 유예를 요구했고, 이에 일부 기자들이 브리핑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특정국가에서는 총영사의 경우에서도 임명 동의를 원하는 경우도 있고, 법적 절차가 끝나기도 전에 보도됐을 때 생길 리스크를 검토했다”는 게 외교부 설명인데요. 아그레망에 따른 언론의 인사 검증 제한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 터져나온 셈입니다.
대부분 공관장은 1·2급 실국장급입니다.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치는 장관급에는 크게 못 미치지요. 하지만 특명전권대사의 명을 받아 주재국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만큼 상징적 의미가 큽니다. 특히 외교부 소속 공무원 외에도 대선 캠프에서 활동했던 인사들이 적잖이 포함됩니다. 공관장 자리가 새 정부의 논공행상으로 통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정부는 내부적으로 고강도 검증을 거친다고 강조합니다. 다만 문제를 제대로 걸러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지난해 공관장 인사에선 다주택 보유로 문제가 됐던 인사가 유럽 지역 대사로 발령이 나서 논란이 일었습니다. 다른 군 출신 인사는 당초 내정된 자리에서 석연치 않은 이유로 중간에 교체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죠. 검증 소홀로 뒤늦게 잘못이 드러나 낙마한 ‘정순신' 사례가 얼마든지 재발할 수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언론의 충분한 사전 검증이 필요할 텐데, 이처럼 아그레망을 방패로 주재국 파견이 임박해서야 명단을 공개할 수 있으니 아쉬울 따름입니다. 아그레망을 둘러싼 외교부와 취재진의 숨바꼭질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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