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내달 초 개최되는 남태평양지역 포럼에 한국이 처음으로 참가하는 것을 계기로 한국과 남태평양도서국가들의 협력관계가 더욱 증진되기를 기대합니다."
1995년 8월 한-피지 정상회담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모두발언
1995년 8월 31일. 시티베니 람부카 피지공화국 총리가 한국을 공식 방문했습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푸른 태평양 대륙'이라 불리는 남태평양의 15개 섬나라들과 포럼을 열고 협력관계를 구축하기로 했죠. 호주 근처에 위치한 작은 나라들입니다.
람부카 총리는 피지의 정상이자 태평양도서국을 대표하는 자격으로 한국에 왔습니다. 한국은 이듬해인 1996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에 처음 선출됐는데, 피지가 공식 문서로 한국을 지지하며 태평양 섬나라들의 세를 규합한 것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한국과 인연이 깊은 람부카 총리는 28년 만에 다시 한국과의 관계를 다지는 데 앞장섭니다. 그는 여전히 피지 총리인데요. 그렇다고 수십 년간 장기집권한 건 아니고, 피지가 16년 만에 정권을 교체하는 데 주역으로 나서면서 그가 23년 만에 다시 피지 총리로 복귀한 것입니다.
그는 29, 30일 서울에서 열리는 '한-태평양도서국 정상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갑작스런 사정 탓에 부총리가 참석하게 됐다고 하는데요. 비록 피지에 남아있지만, 람부카 총리는 한국과 태평양도서국이 의기투합한 첫 해와, 시간이 흘러 한국이 처음으로 태평양도서국 정상회의를 개최하는 역사적 순간을 모두 지키게 됐습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요.
그런데 이런 묘한 기분을 느낄 인사가 한 명 더 있습니다. 바로 박진 외교부 장관입니다.
위 사진을 다시 한번 볼까요. 양국 정상 사이에서 대화를 받아 적고 있는 통역관이 눈에 띄는데요. 당시 청와대 공보비서관이었던 박 장관입니다. 언론을 담당하는 공보비서관인데도 유창한 영어 실력 덕분에 발탁돼 김 대통령의 통역을 전담했다고 하죠. 올해를 시작으로 28년 전 양국 정상의 가교로서 통역에 나섰던 비서관이 이제 한국의 외교정책을 이끄는 수장으로 피지 총리와 대화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아마도 박 장관은 앞으로 람부카 총리를 만나게 되면 "그때 그 통역관이 접니다"라고 말을 건네지 않을까요.
풍부한 해양광물과 넓은 해역…태평양도서국이 '핫'해진 이유?
이처럼 한국은 피지와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제 피지를 거점으로 태평양도서국 전체로 영향력을 넓힐 때입니다. 왜 그럴까요. 태평양도서국이 관할하는 배타적경제수역(EEZ)은 전 세계 면적의 14%에 달합니다. 피지·마셜제도·키리바시·투발루에는 니켈, 코발트, 망간 등 핵심광물이 다량 매장돼 있습니다. 프랑스가 자치령인 뉴칼레도니아와 프렌치폴리네시아에서 심해 다양성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아울러 각국을 오가는 해상 물동량이 많은 곳이기도 하죠.
특히 미중 패권 경쟁이 가열되면서 안보적 요충지로 태평양도서국의 몸값이 뛰고 있습니다. 미국은 마셜제도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시험장을 운영하고 있는데요. 하와이의 인도·태평양사령부, 괌의 해·공군기지와 더불어 태평양의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는 거점이나 다름없습니다.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해 솔로몬제도와 안보협정을 맺었는데요. 당시 미국은 커트 캠벨 백악관 인도·태평양조정관을 급파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같은 움직임에 호주와 일본도 원조와 안보협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6월 호주·미국·일본·뉴질랜드·영국은 태평양도서국들과 '블루 퍼시픽 파트너스'(Blue Pacific Partners)를 발족시키며 공조를 과시했습니다.
기후변화 문제 다급한 태평양도서국…패권경쟁보다 인도주의적 관심 절실
그러나 태평양도서국들은 이런 정치적 셈법으로 자신들에게 손을 내미는 국가들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당장 투발루는 기후변화로 삶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죠. 국가의 생존이 걸린 문제인데도, 그동안 태평양도서국의 절규는 국제사회에서 큰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경제적 가치와 군사적 필요성이 당장의 생존을 위협하는 기후위기를 가렸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이 같은 틈을 파고들 참입니다. 이번 한-태평양도서국 정상회의를 통해 기후위기로 어려움에 처한 태평양도서국을 위한 맞춤형 협력사업을 추진합니다. '자유,평화, 번영의 인도·태평양 전략'의 일환이기도 합니다.
외교부 당국자는 "한국이 태평양도서국가에 기술과 경험은 물론 재정적으로도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많다"며 "기후변화, 보건, 해양수산, 재생에너지 분야의 협력정책을 구체화할 것"이라고 자신했습니다. 글로벌 중추국가(GPS)를 표방한 정부의 시각을 공유하고 한국 외교의 지평을 대폭 넓히는 기회라는 설명입니다. 아울러 니우에와는 29일 공식 수교를 맺었습니다. 이로써 한국의 192번째 수교국 명단에 오르게 됐습니다. 박진 장관과 람부카 총리의 긴 인연처럼 한국과 태평양도서국의 협력관계가 이번 정상회의를 통해 인상적인 족적을 남기길 기대합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