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스포츠의 추락, J스포츠의 비상]
<1>엉망이 된 코트, 벌어진 격차
일본 농구 영재 쌍둥이 선수의 '전국대회 도전'
여자 고교 농구팀 3540개, 오사카에만 200개
팀 내 경쟁 치열…19개 팀 불과한 한국과 딴판
달리고 쏘는 日 농구, 두터운 선수층 덕 가능
"중요한 건 승패보다는 인성" 간호사도 꿈꿔
편집자주
한국 스포츠, 어떻게 기억하나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크게 도약한 우리 스포츠는 국민들에게 힘과 위로를 줬습니다. 하지만 저력의 K스포츠가 위기에 섰습니다. 프로 리그가 있는 종목조차 선수가 없어 존망을 걱정합니다. 반면, 라이벌 일본은 호성적을 거두며 멀찍이 달아났습니다. 희비가 엇갈린 양국 스포츠 현실을 취재해 재도약의 해법을 찾아봤습니다.
3,540 대 1.
지난달 22일 일본 오사카 간사이대 호쿠요 고교 체육관. 코트 위에 선 기모토 사쿠라코(18)가 돌파해내려는 건 상대 선수가 아닌 바늘구멍 같은 확률이었다. 일본 내 여자 고교 농구팀은 모두 3,540개. 사쿠라코가 주장인 쿤에이여학원고교 농구부는 오사카 지역 최강팀이지만, 전국 대회에선 늘 ‘한끗’이 부족했다. 이 탓에 최근 3년간 준우승만 두 차례 했다. 이날 경기는 ‘2023 윈터컵’ 오사카 지역 준결승전으로 고3인 사쿠라코와 동료들에게는 마지막 도전의 장이다. 12월 지역 최강 고교들이 도쿄체육관에서 겨룰 결선 토너먼트 때 가장 높은 곳에 서려면 앞으로 열리는 모든 시합을 이겨야 한다.
‘1분 1초에 목숨을 걸어라.’ 골대 뒤편에는 쿤에이여학원고의 부훈(部訓)이 적힌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다. 이 정도 결기가 없다면 지역예선조차 통과하기 어려운 게 일본 고교 농구의 치열한 현실이다.
고교 여자 농구 등록 선수 5만명…”한 팀에만 42명 경쟁 치열”
일본 여자 농구(세계랭킹 9위)는 2020 도쿄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땄다. 한때는 한국(13위)이 한 수 아래로 봤지만, 이제는 따라잡기 어려운 상대가 됐다. 지난달 중국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도 우리는 23점 차이로 완패했다.
일본 농구의 경쟁력은 ‘바닥’에서 나온다. 유소년 선수층이 두텁다는 얘기다. 농구팀과 선수가 많다 보니 경쟁이 치열해 수준이 높아지고, 뽑아 쓸 선수도 많다. 보건체육교사이기도 한 안도 카오리(46) 쿤에이여학원고 감독은 “오사카에만 여자 고교팀이 200개이고, 일본농구협회에 등록된 고교 여자 선수는 5만1,266명에 달한다”며 “이들을 모두 제치고 전국대회 우승컵을 들어 올린다는 건 기적에 도전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여자 고교 농구팀이 전국에 19개(등록선수 148명)뿐인 우리나라가 그동안 국제대회에서 일본과 대등하게 싸워온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깝다.
농구를 하려는 학생이 넘치다 보니 팀 내 경쟁을 뚫는 것도 쉽지 않다. 쿤에이여학원고의 농구부원은 모두 42명. 이 가운데 정식 경기에서 유니폼을 입고 뛸 수 있는 선수는 15~18명뿐이다. 안도 감독은 “경기에 뛰지 못하는 아이들도 역할이 있다”고 했다. 매니저를 맡아 팀 운영을 돕거나 경기 장면을 캠코더로 기록해 동료들에게 공유한다. 상대팀 선수 데이터를 정리해주는 학생도 있다. 관중석에 앉아 힘찬 응원으로 주전 선수들의 사기를 끌어올려 주는 것도 부원들의 몫이다.
치열한 경쟁으로 다져진 선수들은 코트에만 서면 쌓아온 실력을 뿜어낸다. 쿤에이여학원고는 '슈퍼 스타'가 없는 '슈퍼팀'이다. 주전 선수의 평균 신장은 170㎝를 살짝 밑돌지만 조직력이 뛰어나다. 사쿠라코는 경기 전날 한국일보와 만나 “빠른 스피드와 3점슛을 지켜봐달라”고 말했다. 실제 경기에서 쿤에이여학원고는 스피드와 외곽슛, 리바운드 등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뽐내며 상대인 간사이대학제1부속고교를 가볍게 제압했다.
코트 위 5명의 여고생은 쉼 없이 달리고 쐈다. 포인트가드인 사쿠라코의 지휘 아래 4명의 선수들이 빈 공간을 찾아 뛰었다. 사쿠라코의 쌍둥이 동생이자 슈터인 모모코는 수비수와의 거리가 조금만 떨어져도 림을 향해 공을 던졌다. 주전 센터이자 U18(18세 이하) 일본 국가대표인 시마부쿠로 히로시(18)도 곧잘 외곽에서 슛을 쐈다. 일본 성인 대표팀의 경기 스타일과 비슷했다. 안도 감독은 "유소년 코치 연수를 받을 때 일본여자농구리그(WJBL)에서 ‘신체 조건이 밀리는 일본은 이런 농구를 해야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조언해줬다"고 귀띔했다.
쿤에이여학원고 수비할 때에는 상대편 코트에서부터 강하게 압박해 실수하도록 했다. 점수 차가 30점 이상 벌어진 4쿼터에도 느슨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기동력과 체력을 앞세운 이런 전략은 선수층이 두텁지 않다면 시도하기 어렵다. 안도 감독은 2쿼터가 되자 주축 선수인 모모코와 시마부쿠로를 벤치로 불러들였다. 안도 감독은 이날 경기에서 엔트리에 든 18명의 선수를 고루 기용했다. 그들의 꿈인 ‘전국 제패’의 가장 큰 적은 부상이다. 선수층이 얇은 한국에서처럼 다친 선수가 절뚝거리며 경기를 뛰는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윈터컵 주최 측은 모든 선수가 미리 건강검진을 받고, 부상이 없음을 입증해야 엔트리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한다.
관중석의 응원 열기도 한국의 고교 농구 현장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날 경기는 전국대회가 아닌 오사카 지역 예선전이었음에도 300명 넘는 관중이 좌석을 채웠다. 선수들 부모나 지역 농구 관계자들이 많았지만, 또래 경기를 보려는 다른 팀 선수나 농구를 좋아하는 지역민도 보였다. 사쿠라코는 “인터하이(전국고교종합체육대회) 등 전국대회에 나가면 관중석이 늘 가득 찬다”면서 “그 긴장감을 이겨내며 경기를 하게 되면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관중석에는 사쿠라코∙모모코 쌍둥이의 아버지인 기모토 요시히데(48∙공무원)도 있었다. 딸들은 일본에서 가장 큰 신문사인 요미우리신문에 보도될 만큼 실력이 출중하고 화제성이 크다. 하지만 아버지는 “대학 때까지는 농구를 하겠지만 성인 리그에 도전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쌍둥이는 엄마 직업인 간호사에도 관심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고교 스타 선수가 프로리그 진출만 바라보지 않고 여러 진로를 고민한다는 건 한국과는 퍽 달랐다. 이날 최종 스코어는 73대 27. 쿤에이여학원고의 압승이었다.
부카츠의 힘 “진입 장벽 낮춰 운동∙학업 병행”…고교 女 축구가 3부 리그까지
한국과 달리 일본 고교에는 왜 스포츠팀과 선수가 많을까. 양국의 16~18세 인구가 2.6배(한국 66만 명, 일본 171만 명) 차이 난다는 사실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답은 일본 특유의 '부카츠'(部活∙부활동의 줄임말) 문화에 있다. 일본 중∙고교에는 우리처럼 직업 선수를 꿈꾸는 학생만 모아 놓은 ‘운동부’가 거의 없다. 대신 운동선수가 되려는 학생과 단순히 스포츠를 즐기려는 학생이 부카츠라는 공간에서 함께 땀을 흘린다. 보통 주 3~5일(주말 포함)씩 하루 2~4시간 운동을 한다. 우리로 치면 운동부와 동아리의 중간 형태다. 농구뿐 아니라 야구, 축구, 배구, 육상, 수영 등 주요 종목 유소년 선수들이 학교 부카츠에서 훈련하며 학업을 병행한다. 한번 발을 들이는 순간 운동에만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우리 운동부 시스템과 비교하면 학생이나 학부모가 느끼는 심리적 장벽이 훨씬 낮다. 엘리트 체육계 입장에서도 수많은 유망주의 경기력을 직접 보며 옥석을 가릴 수 있는 이점이 있다.
2016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의 육상 남자 계주 400m 종목에서 은메달을 딴 이즈카 쇼타(32)는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일본 학생의 반 이상이 부카츠에 속해 거의 매일 운동하기 때문에 육상 등 여러 종목이 강할 수밖에 없다"며 "나도 고교 때 취미로 육상을 배우는 학생과 함께 훈련했는데 이 친구들은 공부로 대학을 갔다”고 말했다. 한국에 비해 입시 경쟁이 덜 치열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일본 학생과 학부모들은 부카츠 활동을 통해 인성과 인내력, 협동심을 기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을 익힐 수 있다면, 운동부 활동에 매주 10시간 이상 투입할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자 농구만 저변이 탄탄한 게 아니다. 야구, 축구, 배구, 수영, 육상, 배드민턴 등 거의 모든 종목에서 학생 선수들이 넘쳐난다. 한국의 전국 고교 여자 축구부는 13개뿐(클럽팀 1개 포함)이지만, 일본 고교 여자 축구부는 도쿄도에만 55개가 있다. 팀들은 1~3부로 나눠 연간 리그전을 치른다. 성적 좋은 팀은 이듬해 상위 리그로 올라가는 승강제 시스템이다.
1부 리그팀인 스기나미소고 고교의 유아카 타나베(36∙일본어 교사) 감독은 “우리는 축구부원이 22명인데 다른 팀에 비해 적은 편”이라면서 “도쿄도에서 4강에 오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열도가 깊은 절망에 빠졌던 2011년 당시 독일 월드컵에서 우승하며 자국민에게 희망을 안겼던 일본 여자 축구의 저력은 두터운 저변에서 나온 셈이다.
쿤에이 트리오, 이제 전국으로…"가장 중요한 건 언제나 인성"
쿤에이여학원고 농구부는 지난달 28일 열린 지역 결승전에서도 승리했다. 이제 시선은 전국으로 향한다. 사쿠라코와 모모코, 시마부쿠로에게는 놓칠 수 없는 기회다. 본선 무대에서는 유학생 센터인 '철기둥' 유사후 보란렌(2학년·191㎝)이 버티고 있는 교토 세이카여고, 일본 U-18 국가대표 슈터이자 '야전사령관' 다나카 코코루(3학년·171㎝)가 버티고 있는 나고야 오카학원고교, '컴퓨터 슈터' 아노 나치미(3학년, 172㎝)의 기후현 기후여고 등을 만날 가능성이 높다. 안도 감독은 "결승까지 올라 지난 인터하이 준결승에서 패배를 안겨준 오카학원고에 꼭 설욕하고 싶다"며 의지를 다졌다.
사쿠라코에게 안도 감독이 전국대회를 앞두고 가장 강조하는 게 뭔지 물었다. "늘 같아요. 혼자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과 인사를 잘하라는 것이죠. 승패를 떠나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가장 기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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