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설 명절에 고향에 다녀왔다. 속초~강릉~동해~삼척으로 이어지는 동해안 관광벨트의 맨 아래쪽에 자리 잡은 '맹방(孟芳)'이라는 정감 넘치는 이름의 바닷가 마을이다. 어머님과 여동생이 사는 고향집 뒤에는 큰 소나무 숲에 흙과 돌을 깔아 만든 1.5㎞ 남짓 되는 산책로가 맹방해수욕장까지 조성돼 있다.
여느 때처럼 이번에도 아침저녁으로 그 길을 걸었다. 파도 소리, 바람과 함께 콧속을 파고드는 소나무 향, 맑은 공기, 파란 하늘을 실컷 즐기면서 '언젠가 이곳에서 마음치유 프로그램을 해 보겠다'는 생각을 또 했다.
맹방해수욕장 끝자락에는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 교가에도 나오는 덕봉산이 있다. 군사지역에서 해제된 뒤 조성된 생태 탐방로를 따라 정상에 오르면 끝이 보이지 않는 동해 바다와 백두대간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곳에 앉아 한두 시간 멍 때리고 나면 열심히 살아오느라 바닥까지 소진했던 몸과 마음에 에너지가 충만해지곤 한다.
그런데 이번엔 뭔가 불편했다. 눈에 거슬리는 풍경이 그새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적 조개를 잡고 놀던 바다 한가운데에 인공섬이 하나 생겨났다. 작년 초부터 돌을 나르고 쌓는 공사가 한창이더니 그걸 만드는 작업이었던 모양이다.
인공섬은 급격한 해변 침식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올해 가동을 시작하는 화력발전소가 세워졌는데, 석탄 운송을 위해 만든 전용 부두 때문에 모래가 쓸려 나가니 인공섬을 만들어 조류를 바꿔보려 한다는 것이다.
화력발전소가 들어선다고 했을 때 매연과 석탄 분진으로 인한 대기 오염만 걱정을 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가 생겨나고 있었다. 삼척 시내와 맹방 사이에는 한치라는 이름의 야트막한 산이 있다. 그곳에서 남쪽을 내려다보면 한치 아래부터 맹방해수욕장까지 4㎞ 길이의 '명사십리(明沙十里)' 해변이 펼쳐져 있다.
동해안에서도 경치 좋기로 손꼽히는 백사장인데 최근 몇 년 사이 야금야금 모래가 파도에 쓸려 가면서 백사장 면적은 절반 이하로 줄었다. 인공섬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몇 년 안에 백사장이 다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삼척시가 관광객 유치를 위한 놀이 시설로 한치 고개에서 맹방해수욕장까지 바다 위를 이동하는 집라인을 만들 계획이라는 말도 들었다. 백사장에 앉아 파도소리를 들으며 멍 때리기를 하다 철골 구조물이 앞을 가리고 집라인을 탄 사람들이 휙휙 지나가는 상상을 하니 마음이 갑자기 우울해졌다.
40년 이상 관광지 개발 계획 지구로 묶여 개인 차원의 개발이 제한됐던 농지와 소나무 숲에도 관광시설이 들어설 모양이다. 5년 전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 유산으로 받은 조그만 논이 있는데, 한 부동산 업자가 작년 내내 매매 동의를 해 달라는 전화를 해 왔다. 특별히 팔아야 할 이유가 없어 버티고 있는데, 공공개발 차원에서 근처 땅 소유주의 80% 이상은 이미 매매에 동의했다고 하니 나도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 리조트 같은 관광 단지가 조성되면 많은 사람이 자연의 혜택을 누리겠지만, 나만의 힐링 스폿은 다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내가 힘들 때마다 삶의 에너지를 채워주고 몸과 마음에 쉼을 주었던 맹방의 바다. 익숙한 풍경이 남아 있을 때 더 자주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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