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다시 조근조근 얘기해 봅니다. 다수의 철학서를 펴내기도 한 진은영 시인과 20년 이상 출판 편집 기획자 생활을 거쳐 온 강창래 작가가 '한국일보'에 격주 글을 씁니다.
1909년 프랑스 파리에 사는 한 유대인 의사의 가정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평생 지독한 편두통과 각종 질병에 시달리게 될 병약한 몸을 운명의 달갑지 않은 선물로 받았다. 그 선물꾸러미엔 뛰어난 지성도 함께 딸려왔다. 열네 살부터 산스크리트어로 된 책을 읽었고 두 학년이나 월반을 해서 수재들이 모이는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스물두 살엔 철학 교사이자 노동운동가가 되었으며 1943년 결핵과 영양실조로 죽을 때까지 50편에 달하는 에세이를 썼다. 철학자 시몬 베유의 짧았던 서른네 해 생애이다.
흑백 사진 속에서 베유는 곱슬거리는 짧은 단발에 동그랗고 두꺼운 안경을 썼고 생각이 깊은 눈을 하고 있다. 천재에다 무척 고집 센 책벌레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인 T. S. 엘리엇은 베유의 책 영역판 서문에 “그녀의 영혼은 그녀의 천재성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숭고하다”라고 적었다. 그러니 베유를 읽을 때는 천재라는 점보다는 성자의 기질을 가진 위대한 영혼과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달라고 당부하면서.
이 엄청난 찬사에 베유 자신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디서든 자신이 드러날까 봐 꾸미지 않았고 볼품없는 옷을 입었다. 그 덕분에 똑똑하지만 괴상한 옷차림을 한 여학생으로 유명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베유의 관심은 겨울에도 난방용 기름을 살 돈이 없어 추위에 떠는 노동자들을 향해 있었다. 그들이 안쓰러워 자기 아파트에도 난방을 하지 않고 굶는 이들을 생각하면서 아주 조금만 먹었다. 이 우주적 차원의 공감 능력을 생각하면 그녀의 책들을 펼치기만 해도 다정함의 온기로 몸이 따뜻해질 것 같다.
"보상 없는 희생을 받아들이라"
기대와 달리 베유의 글은 냉정하다. 친구 귀스타브 티봉이 베유 사후에 단상을 모아 출간한 '중력과 은총'을 평온하게 읽기는 어렵다. 심장 속의 먹물 주머니를 터트리는 것 같다. 가령 “달걀 한 알을 얻기 위해 새벽 한 시부터 아침 여덟 시까지 꼼짝 안 하고 서 있을 수 있지만,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기는 힘들다”라는 문장에서처럼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강력한 힘은 고급한 동기보다 저급한 동기에 있다는 신랄한 주장을 만날 때 그렇다. 부정하고 싶지만 사실 일상에는 그런 장면들이 즐비하지 않은가. 베유는 저급한 동기의 에너지가 중력처럼 인간을 아래로 끌어당길 때 은총만이 그를 상승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베유의 ‘은총’은 기독교적인 어휘처럼 보이지만 그것과 차이가 있다. 기독교인에게 고통은 은총이다. 고통 속에는 신의 목적이 숨겨져 있고, 그걸 감내하면 신이 천국의 미래로 보상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유에게 은총은 보상이 없는 것이다. 선행, 사랑, 심지어 순교에도 어떤 보상이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점을 알고 보상의 빈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은총이다.
인간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받아들이기보다는 현실의 공허한 빈자리를 채우려고 상상을 활용한다.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정부를 위해 싸운 민병대원들은 그들의 희생으로 공화정부가 승리할 거라고 상상했다. 공화국의 수호는 그들의 희생에 대한 보상이 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영국과 프랑스가 프랑코 독재정권을 인정하면서 공화국은 무너지고 말았다. 베유는 이 예를 들면서 역사의 비극을 회피하기 위해 보상의 “빈자리를 채우는 상상력은 본질적으로 거짓”이라고 차갑게 말한다. 그렇다고 민병대의 죽음이 헛되다는 말은 아니다. 삶과 역사는 고통스러운 빈자리들, 즉 보상 없는 희생들로 끝없이 이어지지만 “그 끝없음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면서 응시하면 우리는 뜯겨 나와 영원에 이르게 된다.”
영원에 이르는 은총이 우리에게서 멀기만 한 것은 아니다. 계속되는 사회적 참사들을 겪으며 우리는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말을 수없이 되뇌었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는 것이 진정한 사랑 아닌가. 친지들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조차 부끄러워하며 자책하지만 베유라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사랑은 사랑하는 이를 지키는 게 아니라 사랑을 지키는 겁니다." 인간의 사랑은 보잘것없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고 싶어도 세계의 난폭함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무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유는 부재하는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멈추지 않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죽은 이들에 대한 경애심. 존재하지 않는 것을 위해 뭐든지 하기”는 인간을 운명의 중력에서 뜯어내어 영원 속으로 들어 올리는 사랑이다. 사랑을 지키는 사람은 승리에 대한 상상 없이, 미래의 보상을 구하지 않고 전투에서 목숨을 거는 병사와 같다.
'몰개성적 사랑'만이 폭력에 맞선다
또한 사랑은 무차별적이어야 한다.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에서 베유는 죽어가는 모든 가여운 것에 대해 애정을 보였던 호메로스야말로 가장 진실한 작가라고 평가한다. '일리아스'를 읽으면서 작가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추측하기는 힘들다. 트로이 병사들이 그리스인의 창과 칼에 죽어갈 때도 기뻐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햇빛처럼 모든 사람에게 관여하는, 슬픔으로 인해 (……) '일리아스'의 음조는 슬픔에 젖어 있지 않을 때가 없다." 이 슬픔 속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승자와 패자를 모두 사물로 만들어 버리는 강력하고 몰개성적인 힘이다. 그 힘의 노예가 되는 것은 패자뿐이 아니다. 점령지에서 지나가는 소녀를 사격하고 나서 쓰러진 시신 옆에서 한가로이 커피를 마시는 병사는 승리한 ‘사물’이다. 살려달라는 말이 물질에 전해지지 않듯이 병사에게도 전해지지 않는다. 눈앞에서 끝없이 목격되는 고통을 회피하려고 병사에게서 그의 정신이 이미 도망쳐버렸기에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물이 된다.
‘수동적 물질로의 전락’은 트로이 전쟁에서 살인자와 희생자들이 처했던 상황이며 이후 3,000년 동안 계속 반복되어온 상황이다. 이 하강 운동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베유는 나라, 계급, 성별, 재능 등 개인적 표식을 지워버린 채로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말한다. 인류에게 공통적 처참함을 만들어내는 몰개성적인 힘의 폭력에 맞설 수 있는 것은 몰개성적인 사랑뿐이라는 뜻이다.
'신을 기다리며'의 한 에세이에서 베유는 불행한 사람들에게는 “오로지 주의를 기울이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필요할 뿐”이라고 말한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이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지금 어떤 일을 겪고 있나요?’라는 물음이다. 그것은 수난자가 존재한다는 인식이다. (……) 우리와 다를 바 하나 없지만, 어느 날 천형이라는 특별한 낙인이 찍혀버린, 한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인식 말이다.” 자신도 언제든 불행한 자가 될 수 있다는 보편적 수난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기에 사람들은 고통을 경험한 이를 비난하거나 사물처럼 무시하게 된다. 현실에서 수난은 평범한 이들 모두에게 닥친다는 정확한 인식만이 약자에 대한 경멸을 막을 수 있다.
낙관의 나라가 열광한 비관적 사상가
데보라 넬슨에 따르면, 베유의 책들은 1950년대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수십만 독자들이 병약하고 비관적이었던 여성 사상가의 짧은 삶과 글에 열광했다. 당시 미국인들이 공황과 세계대전의 상흔으로 이른바 ‘공습대피소 정신 상태’, 즉 강박적으로 정상성과 안전성을 추구하며 “내면을 지향”하고 “가장 인습적인 형태의 가정생활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보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현상이다.('터프 이너프')
수전 손택 역시 괴벽에 가까운 금욕을 보이며 행복과 보상을 경멸한 베유가 행복 추구와 낙관주의로 채워진 미국인의 영혼을 뚫고 침투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결론 짓는다. “우리가 그처럼 가차없는 기인(奇人)들을 읽는 것은(……) 그들이 본보기로 보여준 진지함 때문에, 진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그들의 명백한 의지 때문”이다. “삶뿐만 아니라 진지함도 사랑하는 한, 우리는 그런 생에 감동을 받으며 희열을 느낀다. 그런 생에 경의를 표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세계에 수수께끼가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다.”('시몬 베유')
< 알립니다 >
진은영 시인이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진 시인의 글을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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