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한마디 좀 하고 시작하겠습니다.
私達も論点をはぐらかし、韓日関係に水を差す日本にうんざりしています。
우리도 논점을 흐리고, 한일관계에 물을 뿌린 일본이 지긋지긋해지고 있습니다.
어쩜 이렇게 예상한 대로 움직일까요. 극우매체로 알려진 산케이신문은 한국의 사도광산 추도식 불참 결정을 '반일병(病)'으로 몰아가기 바쁩니다. 일본 정부와 다수의 일본 언론은 교도통신의 오보 탓으로 돌립니다. 일본 대표로 추도식에 참석한 이쿠이나 아키코 외무성 정무관의 과거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지적하는 한국 언론보도가 쏟아지자 일본 매체들의 사이트에선 관련 기사들이 갑자기 삭제됐습니다. 이후 뒤늦게 오보 발표가 났죠.
오보 인정이 늦어졌는데도, 추도식 불참의 책임을 한국 정부에 돌리기까지 했습니다. 지난달 24일 사도광산 추도식에서 일본은 '반쪽짜리 행사'의 책임을 한국에 돌리기 위해 좌석을 치워달라는 우리 측 요청을 거절하고 빈 좌석으로 한쪽을 꽉 채웠죠.
이쯤 되니 질문하게 됩니다.
도대체 무엇이, '피부에 와닿는 한일관계 개선'이라는 것일까요?
'호구 외교' 비난에도 계속된 尹 정부의 과거사 외면…결과는 일본의 '뒤통수치기'
퍼주고도 허를 찔려 허둥대는 '호구 외교'가 따로 없습니다. 극우 성향의 사람들이 문재인 정부를 '북한 호구'라고 조롱했다면, 윤석열 정부는 일본 호구로 조롱당할 지경입니다. "중요한 것은 일본의 (자발적) 마음"을 외치며 과거사 문제를 뭉개기로 한 윤 정부의 대일 접근법에 일본은 뒤통수치기로 일관하고 있으니까요.
따져볼까요. 지난해 3월 정부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지원재단이 일본 피고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모두 떠안기로 한 제3자 변제안을 발표합니다. 대법원 판결을 비틀어버린, 엄청난 정치부담을 떠안은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일본은 윤 정부의 선택을 당연하게만 여겼죠. 일본 피고기업들은 '배임'을 핑계로 재단에 기부하길 거부했습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이 줄을 잇자 3자 변제를 위한 기금은 고갈이 임박한 상황인데도 말이지요. 강제동원 해법 발표 이후에도 일본은 강제동원을 부정한 교과서 검정 결과를 내놓고 외교청서에도 과거사를 왜곡한 내용을 버젓이 담으며 우리 정부를 곤혹스럽게 했습니다.
기시다 후미오 당시 총리가 방한해 "마음이 아프다"며 위로를 전했지만, 간토 대지진 100주년에는 다시 조선인 피해자들의 희생을 외면했죠. 오죽하면 미국 외교가에서조차 "지질하다"는 말이 나옵니다. 한일관계 개선 성과에 대해 미국이 괜히 "윤석열 대통령의 결단"을 강조한 게 아닙니다.
일제강점기의 불법성, 역사 속에 봉합했던 한일
1965년 한국과 일본은 일제강점기 식민지배의 불법성 여부에 대한 판단을 하지 않기로 하고 관계 개선을 우선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체결된 것이 바로 청구권 협정입니다. 청구권 협정 당시 한국과 일본 양국은 식민지배의 불법성 여부를 두고 입장이 서로 다르더라도 외교적 마찰이 되지 않도록 의제화하지 않는다는 '암묵적 합의'를 하게 됐죠. 그것이 2000년대까지 일본 관료들이 각종 '과거사 망언'이 있을 때마다 사과 기자회견을 열고 심할 경우 사임까지 했던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이 '암묵적 합의'에 따른 한일 간 화해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민의를 반영하지 못한 정부 주도의 화해였다는 점입니다. 소외됐던 일제강점기 한국인 피해자들은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과 더불어 일본에 제대로 된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반발했습니다. 식민지배 경험이 있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국제규범을 주도하고, 과거사 문제에 사과하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이 받을 수 있는 '사과'에는 늘 한계가 있었습니다.
뒤통수치는 일본과 골대 옮기는 한국
그나마 가해 역사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인정한 고노담화와 무라야마담화가 이어지고 아시아여성기금이 발족하는 진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피해자들과 시민단체들이 요구한 건 '법적 책임'이었습니다.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때도 마찬가지였죠. 대한민국 정부는 받아들였지만 국민이 받아들이지 못한 '반쪽' 절충과 화해가 반복됐습니다.
일본은 이것을 '골대를 옮겨대는 변죽'이라고 프레임하고, 국제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이간질을 퍼부었습니다. 한국은 국가와 국가 간 합의와 규범을 존중하지 않은 '무법국가'라고 낙인찍었죠. 효과는 컸습니다. 문 정부 시절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불발된 배경으로 이 같은 일본의 이간책이 적잖은 영향을 미쳤으니까요.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일본 극우세력의 태동이었습니다. 아시아여성기금이 끝내 실패로 돌아가자 정치·사회집단이 새로 등장합니다.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지지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회의'와 '일본의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 모임(일역모)'이었습니다. "더 이상 과거사 문제를 사과하지 않겠다"며 안면몰수한 아베 총리의 장기 집권으로 한일관계는 역사문제를 중심으로 급속도로 냉각되기 시작했습니다.
역사 망각한 尹 정부와 시대변화 읽지 못한 일본
지난 반세기 동안 반복된 역사갈등의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해 손을 내민 것은 윤석열 정부였습니다. 대법원 강제동원 판결 이루 일본의 수출통제와 국제무대에서의 외교마찰로 한일 모두 지쳐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과거사 문제의 완전한 해법은 냉혹한 국제무대에서 이뤄내기는 어렵다는 걸 깨달은 대중은 윤 정부의 '3자 변제안'을 비판하면서도 "대안이 없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지난해 3월, 대중의 반발이 거세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과거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진정한 화해가 가능한지, 그 방법론을 두고 한국 내부에서 다양한 토론과 성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윤 정부가 세 가지를 간과했습니다. △과거 제국주의 주도 국가들의 쇠락 △민의를 살펴야 하는 민주제의 특성 △국가정체성이자 헌법정신으로서 정부가 지켜야 할 역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한국은 이젠 1인당 소득이 일본보다 높은 강국의 반열에 올랐고, 일본의 3대 무역 흑자국이 됐습니다. 바꿔 말하면, 일본의 경제성장을 위해서도 한국은 필요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일본이 한국과 역사문제를 화해하고 탄탄한 미래 지향적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한 시점입니다.
화해를 원한다면 시대의 변화를 읽고 태도를 바꿨어야 합니다. 지난 2022년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는 서인도 회사를 설립해 노예무역을 이행한 것에 대해 공식 사과했습니다. 지난해엔 네덜란드 국왕까지 나서서 사과를 했죠. 독일도 나미비아에서 발생한 대학살에 대해 사과했습니다. 비록 식민지배에 대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알제리·르완다에서 발생한 학살을 인정하고 사과했습니다. 진상규명을 위한 '역사공동위원회'를 꾸리겠다고도 했죠. 선진 국가들이 돌연 피지배국가들에 사과하는 이유는 단 하나, 국력을 강화하고 국제정세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협력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윤 정부의 양보에도 일본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정부가 이런 방식으로 나오면 정부가 강경하게 나섰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군부독재체제가 아닙니다. 대통령은 민의를 반영했어야 합니다. 가뜩이나 일방적인 양보로 국민은 불만이 가뜩 쌓이고 있는데 정부는 "피부에 와닿는 한일관계" 개선만 외치며 역사문제를 외면했습니다. 우리 헌법정신과 관련한 역사문제인데도 말이죠.
'성찰' 강조한 카우라 포로수용소 추도식
전직 일본 고위 외교관은 본보 기자와 만나 역사문제와 관련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리 한일관계 개선이 중요하더라도 각국 외교관으로서 포기할 수 없는 원칙이라는 것이 존재하죠. 이 원칙은 아무리 미국이라도 해도 양보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 원칙이 서로 충돌한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다만, 서로 다른 입장을 존중하고 유지하면서도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외교'겠죠."
우리는 왜 이렇게 하지 못했을까요. 그리고 일본 외교관들은 왜 정작 윤 정부가 크게 양보했을 때 사도광산 추도식을 포함한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 한국을 존중하지 않은 것일까요.
일본은 사도광산 추도식을 '모든 노동자, 특히 한국인 노동자들을 진심으로 추모하는 자리'가 아닌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보고하는 자리"로 꾸몄습니다. 추도식의 개회사와 일본 정부대표 인사말에서 '한국인 노동자'와 '추모의 메시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10% 수준에 그쳤습니다. 한국인 노동자들의 유족에 대한 비용도 한국 정부에 전가시켰습니다. 이 정도면 작정하고 모욕을 주려고 한 것인가 싶습니다.
'카우라 포로수용소'라는 곳이 있습니다. 호주 뉴사우스웨일스(NSW)주 카우라라는 도시의 수용소인데, 남태평양 전쟁 당시 2,200여 명의 일본군 포로를 수용하고 있었습니다. 포로로 죽는 건 수치라는 생각에 일본군 1,000여 명이 폭동을 일으켰는데요.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230여 명의 일본군 병사가 죽고 감시하던 호주 병사 4명이 희생됐습니다.
일본 정부가 유일하게 공식 인정한 해외 일본 전쟁묘지인 이곳에선 매년 카우라시 주최로 추도식이 열립니다. 일본 외무성 정무관도 매년 참석합니다. 올해는 카우라 포로수용소 폭동사태 80주년을 맞이했는데요.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는 "이날을 기억해 암흑으로 가득했던 세계 2차대전의 날들을 극복하고 호주와 일본이 우정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을 아는 게 중요하다"며 "이 우정은 상호 존중과 협력으로 가능했다"고 말했습니다. 카우라 시의회는 일본군을 추모하며 "이날의 교훈을 되새기고 충돌을 대화와 존중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후세대에 알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일본군 병사들이 집단적으로 일으킨 폭동이었는데도 호주는 '교훈' '아픈 역사' '암흑' '존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고인을 추모하고 상호 존중을 강조하는 데에 집중했습니다.
세계유산 등재 자축만 가득했던 사도광산 추도식
다시 사도광산 추도식 얘기를 해봅시다. 하나즈미 히데요 니가타현 지사의 개회사와 이쿠이나 정무관의 인사말에는 이런 발언들이 있었습니다.
"세계유산 등록은 모든 분의 헌신과 노력 덕분에 실현됐습니다."
"국내외 많은 사람이 이곳을 방문해 사도광산의 세계문화유산으로서 가치를 알고, 니가타의 매력을 더 깊이 알게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광산의 발전은 채굴에 종사한 수많은 노동자의 노력의 결실입니다."
"사도광산이 세계유산에 등록된 지금, 선조들이 쌓아온 역사를 되새기고 미래에 계승해 나가는 의지를 새롭게 해야 할 때입니다."
대한민국이 사도광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반대하지 않은 건 일본이 강제동원 문제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개회사와 인사말에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강제동원에 대해 반성하거나 사과하거나 '성찰'하는 메시지가 없습니다. 일본과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희생당해줘서 고맙다는 취지의 메시지들만 가득합니다. 직접적으로 '사과'하지 못한다면 최소한 '성찰'하는 자세라도 보였어야 합니다.
하다못해 한일 역사 화해의 의미로서 세계문화유산 등재만큼 한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반성과 유감 표명을 상세하게 서술했어야 합니다.
2021년 NHK는 미군 포로를 상대로 자행한 인체실험을 다룬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しかたなかったと言うてはいかんのです)'를 종전기념 드라마로 방송했죠. 규슈대 의대에서 전쟁포로를 상대로 자행된 전쟁범죄를 두고 해당 대학교는 반성의 뜻을 강조하며, 사건 경위와 반성의 뜻을 담은 전시물을 설치했습니다.
다시,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의 성찰은 왜 선택적인가요?
그런 상대한테 윤 정부는 왜 일방적으로 양보하고 있는 건가요?
사도광산 추도식 사태 이후 한국과 일본 양측에서 협력을 강조합니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내년 1월 한국을 방문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셔틀 외교를 중단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대화는 더욱 돋보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정상 차원에서 삐걱거리는 역사문제를 얘기할 수 없다면 무용지물입니다. 서로의 국가정체성을 존중하는 노력이 없다면, 갈등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적 성찰 없는 한일 수교 60주년이 의미가 있을까요?
대한민국과 윤 정부는 여러 차례 화해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걸 내친 건 일본입니다. 일본이 손을 잡지 않겠다고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대체 언제까지 계속 손을 들고 있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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