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가부장적 압력 속 자기돌봄 기술 익히기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서한영교 작가가 격주로 글을 씁니다.
다가올 미래를 기대하는 밤
-백수린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중
아침에 눈떠 창밖을 바라보던 아이는 우와! 우와! 우와! 했다. 눈, 눈, 눈, 우와! 우와! 대도시의 첫눈 풍경은 확실히 우와, 했다. 채도 낮은 회색의 도시풍경을 흰 눈이 우아하게 뒤덮었다. 우와, 벌써 올 한 해도 이렇게 마무리돼 간다.
첫눈이 내린 날부터 한 해를 정리하고 서서히 돌아보는(re-view) 시간을 가진다. 오래된 습관이다. 감정·느낌을 꾹 누른 채 지내게 하는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나도 모르게 냉랭해져 있는 몸과 마음을 돌아본다. 꾹 짓눌린 감정과 느낌을 돌보는 페미니즘의 자기 돌봄 기술을 뒤늦게 익히기 시작한 뒤로, 첫눈과 함께 나를 다독이고 곁을 살피는 시간을 갖는다.
꾹, 참다 욱, 하고 쾅, 터지는
가부장 문화 속에서 고통을 표현하는 남성은 나약한 것이라는 성차별적 원칙을 굳게 믿어왔다. 남자다운 척, 그것은 고통을 느끼지 않거나 느끼지 않는 척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씩씩하고 용감하게 취약한 감정·감각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 남자다운 태도라고 익혀 왔다. 자신의 고통을 부정하도록 남성을 사회화하는 가부장제는 취약한 모습을 드러낼 때면 공격, 경멸, 조롱, 창피, 모욕을 받을 것을 예감하게 한다.
그러다 보니 드러내는 것보다 차라리 꾹, 참는 쪽을 선택한다. 그냥 묻고 살고 잊고 살고, 꾹, 참고 산다. 이러한 가부장적 감정-금욕술은 남성을 혼자만의 어두운 동굴로 몰아넣고 혼자 해결하게 한다. 동굴 속으로 중독, 우울, 고립이 찾아든다.
그러다 꾹, 눌러온 동굴 속 감정들이 욱, 하고 쾅, 터지기도 한다. 독단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주변을 자기 폭력 아래로 굴복시키고자 한다. 남성들에게 허용되는 몇 안 되는 감정 표현 방식은 욱, 하고 화를 내며 쾅, 하고 분노를 터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사례를 들지 않아도 주변에 쾅쾅거리는 사건 사고들은 널려 있다. 특히 요즘이 더 그렇다. 꾹, 누른 채 지내다 욱, 하고 화내고 쾅, 하고 사고 치지 않는 남자가 되지 않기 위해 몸과 마음을 살피는 자기 돌봄의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고통과 괴로움
첫눈과 함께 시작되는 자기 돌봄·돌아봄의 과정에서 그때 그 순간을 뒤적이는 일은 반짝이는 아름다움이 앞장설 때도 있지만 괴로움이 앞장설 때가 더 많다. 몸과 마음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괴로움의 가시'들이 처박혀 있는 자리가 드러난다.
페미니스트 시인 오드리 로드는 고통(pain)과 괴로움(suffering)을 구분한다. 고통은 "어떤 식으로든 인식되고 명명되고 활용되는" 것이고 "경험을 뭔가 다른 것-힘이나 지식이나 운동으로 전환"하게 한다. 반면 괴로움은 "성찰과 소화 과정을 거치지 못한 고통을 반복해 겪는 악몽"으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악순환된다"고 말한다.
내가 가진 역량을 빼앗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약화하며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드는 '괴로움' 중에서도, 가까이 어울렸던 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여러모로 감정적 곤경에 빠지게 한다. 끈질긴 괴로움 속으로 빠트린다. 올해에도 그런 죽음들이 있었다.
하얀 국화처럼 흰 눈이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지 못해 생존을 위해 집 밖으로 뛰쳐나와 보호시설과 모텔 생활을 반복하다 돌연히 지상을 떠난 탈가정 청년의 얼굴 하나. 성별 이분법 사회에서 자신을 이물질 같은 존재로 여기던 세계의 혐오와 차별에 맞서 트랜스젠더의 권리와 존엄함을 위해 끝까지 투쟁하다 문득 지상을 떠난 트랜스젠더 여성의 얼굴 둘.
비장애 중심주의 사회에서 쓸모없는 존재로 버려진 채 길거리와 쪽방을 떠돌다 이 세계의 자기 자리를 권리라는 이름으로 만들어가다 느닷없이 지상을 떠난 발달장애인의 얼굴 셋. 인간의 곁을 떠나지 않고 도시 곳곳을 어슬렁거리며, 비인간 동물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 생각해 보라며 골목을 누비다 난데없이 차에 깔려 지상을 떠난 동네 고양이의 얼굴 넷… 올해 지상을 떠난 얼굴들이 첫눈과 함께 소복이 쌓인다. 첫눈은 하얀 국화처럼 쏟아진다.
애도와 멜랑콜리아
많은 이들이 말한다. 사내답게 떠나보내라고. 훌훌 털어내고 다 잊어버리라고.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그냥 묻어두라고 한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도 "다 잊고 떠나보내라"고 한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멜랑콜리아를 구분하는데 "떠나보내는" 애도는 죽은 이들과의 유대를 끊어냄으로써 잊어버리는 것을 건강하다고 본다. 반면 "떠나보내지 못하는" 멜랑콜리아는 죽은 이들을 떠나보내기를 거부하고 대상을 자아 안에 간직하는 병리적 현상으로 보았다.
하지만 멜랑콜리아를 병리적 현상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상실의 의미를 계속해서 부여하는 일"이자 "타자와 함께 과거가 현재에도 살아 있도록"(필리스 실버맨, 데니스 클래스)하는 윤리적 행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애도는 "자기 안에 타자의 묘소를 마련하는 일"(자크 데리라)이기도 하다.
이는 내 안에 당신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자 당신에게 못다 들은 말을 들으려는 자리다. 당신을 기어이 기억하고자 하는 자리, 즉 "기억(remember)한다는 것, 그것은 다시-멤버(re-member)가 되는 일"(도나 해러웨이)이다. 나를 쪼개 당신의 일부로 기억하며 당신의 구성원으로서 있겠다는 것.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전태일)로서 의지를 이어가기 위해, 나는 떠나보내지 않으려 한다. "과거를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함께 해방되고 싶은 것"(벨 훅스)이다.
고통과 고통들
악몽처럼 반복되던 괴로움이 인식된 고통으로 전환될 때 "고통의 경험은 몸을 (세계와) 단절시키는 게 아니라 고통을 겪는 몸을 다양한 몸이 이루는 세계와 연결"(사라 아메드)한다. 즉 고통은 치워버려야 하는 것만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가담할 수 있는 역사적 자산이 되기도 한다. 인식된 고통은 '나 아닌 다른 존재'의 고통에 가닿을 수 있는 윤리·정치적 감각이 된다.
인식된 고통은 언제나 홀로 있다고 여겨질 때도 고통들이 된다. 고통들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고통들은 역사화되고 곧 정치가 된다. 고통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익혀야 할 어금니 문장을 발음해보게 한다.
"당신에게는 애도 가치가 있다. 당신의 죽음은 감당 불가능한 손실이다. 나는 당신이 살아주기를 바란다. 나는 당신이 살고 싶어 하기를 바란다. 부디 나의 소망을 당신의 소망으로 삼아주기를, 당신의 소망은 이미 나의 소망이 되었으니까."(주디스 버틀러)
눈을 쓸 듯
숙제를 학교에 두고 온 아이와 함께 조금 일찍 등굣길에 나섰다. 눈이 잔뜩 쌓였다. "우와~ 눈! 눈! 우와~" 하며 눈 쌓인 길로 아이가 뛰쳐나가다 갑자기 콰당 미끄러졌다. 느닷없이 미끄러진 탓에 놀랐는지 한동안 눈밭에 드러누워 있더니 벌떡 일어나 점퍼에 묻은 흰 눈을 털었다. 씩씩하네, 말하려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괜히 씩씩한 척 안 해도 괜찮아"라고 했다. 아픈 건 아프다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일은 가부장제 사회 속 남자 아이들에겐 연습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니까.
발끝에 감각을 곤두세워 걸으며 도착한 초등학교 교문 앞. 새벽부터 내린 눈이 쌓이고 쌓이다 겨울 바람에 얼어가는 것을 누군가 쓸고 있었다. 어린이를 학교 안으로 들여보내고 돌아서서 나도 눈삽을 들고 눈을 쓸기 시작했다. 조금 하다 보니 금세 땀이 났다. 움츠러들어 있던 몸과 마음도 펴지기 시작했다. 눈을 쓸다보니 학교 앞 언덕길에 쌓인 눈 사이로 안전하게 걸어 다닐 수 있는 길이 만들어졌다.
눈을 쓸 듯, 수북하게 쌓여 있는 감정 더미들을 쓰다듬어 보는 연말이다. 자신을 쓰다듬는 일, 곁을 보듬는 일을 통해 만들어지는 길이 있다. 꾹, 참다 욱, 하고 쾅, 터지는 길이 아니라 모두가 안전하게 교감할 수 있는 길, 그 길을 쓸어본다.
위로처럼 눈송이가 내리는 밤
-백수린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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