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중국 장난감 시장 신화 쓰는 팝마트
5년 새 10배 성장...레고 절반 수준 매장 확장
유명 아티스트 제작 '팝아트' 이미지 적극 활용
블라인드 박스로 스트레스 해소하는 중국인들
글로벌 장난감 시장에서 중국산 이미지는 '3류' 그 자체였다. 선진국 완구 업체가 주문한 장난감을 찍어내기만 하는 '하청 국가', 인기 캐릭터를 베껴 만들어 어색하기 짝이 없는 '짝퉁 장난감 대국' 정도로 인식돼 왔다.
'중국 장난감은 싸구려'라는 인식을 깬 기업이 있다. 창업 14년 만에 '블라인드 박스'(랜덤 박스) 판매 전략을 앞세워 중국 어린이는 물론 키덜트족(아이 같은 취미를 가진 성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아트토이 전문 업체 팝마트(파오파오마터·泡泡瑪特)다.
세계 유명 디자이너들이 제작한 고급스러운 피규어 상품을 실제 내용물을 모르는 상태에서 고르는 랜덤 박스 전략을 앞세운 팝마트는 10여 년 사이 중국에만 370개 넘는 매장을 열면서 현지 완구 시장을 장악했다. 한국 일본 태국 등 아시아 시장은 물론 유럽·미국 시장에도 성공적으로 진출하면서 글로벌 장난감 시장의 신흥 강자로 떠올랐다. 최근 싱가포르의 일부 브랜드는 팝마트 피규어 상품의 지식재산권(IP)을 도용한 것으로도 드러났다. 외국 장난감 베끼기에 급급했던 중국 장난감 산업을 해외 선진국이 베껴가고 싶은 수준으로 팝마트가 격상시킨 셈이다.
미국 경제 매체 포브스는 "미국 소비자까지 겨냥할 수 있는 중국 업체가 다름 아닌 장난감 시장에서 탄생했다"고 했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팝마트는 장난감 구매 행위를 예술품 수집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고 평가했다.
'장난감'과 '팝아트' 중간 어딘가
팝마트 실적은 그야말로 수직 상승 중이다. 2018년 5억1,400만 위안(약 1,000억 원)이었던 매출액은 2019년 10억 위안을 돌파한 뒤 2020년 25억1,300만 위안, 2022년 46억1,700만 위안에 이어 지난해에는 63억 위안(약 1조2,200억 원)을 기록했다. 5년 새 10배나 성장한 것이다.
올해 상반기 매출액은 전년 대비 62% 증가한 45억5,800만 위안이었다. 3분기 매출액은 무려 120% 증가했다. 상승세를 이어가면서 올해 100억 위안(약 1조9,400억 원) 이상의 매출이 가능할 것으로 팝마트는 예측하고 있다.
팝마트의 인기 비결은 단연 팝마트가 자체적으로 만들어낸 피규어 상품이다. 기존 완구 시장에서 잘 팔렸던 피규어들이 미국 애니메이션이나 일본 만화책 속 인물을 재현해낸 '파생 상품'이라면, 팝마트 피규어는 여러 나라 디자이너들이 독립적으로 만들어낸 '순수 창작물'에 가깝다.
팝마트 1호 캐릭터인 '몰리'는 캐니 웡이라는 홍콩 디자이너의 작품이다. 한 자선사업 행사에서 어린이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던 웡이 아이들 대부분이 입꼬리를 내린 채 삐쭉삐쭉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발견, 이를 캐릭터로 제작했다. 2010년 당시 베이징에서 잡화점을 운영하고 있던 왕닝 팝마트 회장이 몰리 저작권을 사들인 게 팝마트 신화의 시작이었다.
이후 출시된 스컬판다, 디무, 몬스터, 지모모 등 인기 캐릭터 대부분이 아시아와 미국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가 만들어낸 캐릭터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라피티 예술가인 미국의 키스 해링도 팝마트와 협업하고 있는 아티스트 중 하나다. 베이징 차오양구의 한 쇼핑몰에 입점한 팝마트 매장에서 만난 대학생 가오(23)는 "팝마트 캐릭터들은 장난감이기도 하지만 예술적 가치가 있는 작품 같은 느낌이 있다. 그게 가장 큰 매력"이라고 말했다.
주력 상품인 높이 7~8cm 미니 피규어 가격은 69~79위안(약 1만3,000~1만5,000원) 정도다. 이보다 더 큰 피규어의 경우 수십만 원에 달한다. 팝마트 주요 고객층인 어린이와 키덜트족에겐 만만치 않은 가격이다. 하지만 몇 번 가지고 놀고 버릴 장난감이 아닌 유명 팝아트 아티스트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감당 못 할 가격도 아니다.
캐릭터에 부여된 스토리가 없다는 점도 특징이다. 월트디즈니 작품 토이스토리의 '버즈'에겐 외계인 침공을 막아야 하는 거창한 임무가 있지만, 자신이 장난감인지도 모르고 있다는 그만의 정체성이 있다. 마블 작품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너구리 캐릭터 '로켓'에겐 인간의 동물 생체 실험으로 태어난 존재라는 가슴 아픈 사연도 있다.
반면 팝마트는 자사 캐릭터에 의도적으로 어떤 정체성이나 스토리도 입히지 않았다. 한국인인 문덕일 버블마트 국제사업부 사장은 대만 매체 톈샤에 "젊은이들은 더 이상 디즈니 영화를 보는 데 2시간씩 허비하지 않을 것"이라며 대신 "1분 안에 소비자의 관심을 사로잡을 수 있느냐가 중요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애니메이션이나 소설 등 원작에 의존하기보다 캐릭터 자체가 주는 감성이 젊은 소비자에게 다가가기 유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랜덤 박스 열며 스트레스 해소
외신들은 무엇보다 랜덤 박스 판매 전략을 가장 큰 성공 열쇠로 꼽는다. 팝마트 제품 대부분은 내용물을 볼 수 없도록 한 상자 속에 담겨 있다. '핑크색 라부부 피규어'를 갖고 싶다면 어떤 피규어가 들어 있을지 모를 박스에 돈을 지불하는 리스크를 감당해야 한다. 운때가 맞지 않으면 갖고 싶은 제품을 살 수 없고, 소비자는 핑크색 라부부를 얻기 위해 계속해서 돈을 지불하게 된다. 필리핀의 팝마트 애호가인 30대 여성 아나 곤잘레스는 미국 경제 매체 비즈니스인사이더에 "상자 속에서 어떤 색상의 캐릭터가 나올지 모르는 상황 자체가 신나는 일"이라며 "블라인드 박스를 여는 것은 피곤한 일주일을 보낸 나에게 주는 보상"이라고 말했다. 곤잘레스는 자신의 팝마트 컬렉션에 총 500달러(약 70만 원)를 지출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팝마트의 이 같은 사행 심리 자극 전략이 중국 젊은이들의 스트레스 해소 욕구와 맞아떨어졌다고 분석한다. 모어다이칭 중국전자상거래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인터뷰에서 "중국 청년들은 갖은 사회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며 "이를 해소할 욕구가 크다"고 짚었다. 마치 복권을 긁을 때 느끼는 설렘과 예쁜 피규어로부터 얻는 정서적 위로를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있다는 뜻이다. 영국 시장조사기업 민텔의 조이 쿵 트렌드 매니저는 "청년들의 가처분 소득이 감소하고 있는 흐름 속에서 팝마트 장난감은 정서적 안정과 저렴한 사치품의 역할을 동시에 해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창업 14년 만에 레고 절반 수준 성장
서방 언론들은 수년 전까지만 해도 팝마트의 성공이 중국을 벗어나 해외까지 이어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중국 장난감의 고급화 과정은 고무적이지만 월트디즈니, 마블코믹스 등 막강 캐릭터들을 보유한 공룡 기업이 버티고 서 있는 서구권 시장을 뚫기는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예상은 빗나갔다. 올해 상반기 기준으로 팝마트는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뉴질랜드 등 30여 개국에 지점을 냈다. 미국의 경우 지난해 9월 뉴저지에 첫 매장을 연 지 1년도 되지 않아 캘리포니아, 워싱턴, 로스앤젤레스 등에 총 16개의 매장을 냈다. '메이드 인 차이나' 경시 풍조가 유독 강한 한국에도 홍대, 코엑스, 용산 아이파크몰, 부산 삼정타워 등 7개 매장이 있다. 중국 매장을 포함, 전 세계 총 480여 개 지점을 운영 중이다. 창업 14년 만에 글로벌 완구 시장 최강자이자 90년 역사를 자랑하는 덴마크 기업 레고(1,031개)의 절반 수준까지 도달한 것이다.
실제 팝마트 해외 매출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지난해 처음으로 10억 위안(약 1,900억 원)을 넘어섰고, 올해 상반기엔 전년 동기 대비 260% 증가한 13억5,000만 위안(약 2,600억 원)을 기록했다. 올해 3분기 해외 매출액 증가율은 440%에 달했다. 14억 중국 내수 시장에 치우쳤던 매출 비중이 해외 시장으로 급격히 커지고 있는 셈이다.
팝마트는 향후 수년에 걸쳐 테마파크, 애니메이션, 게임 산업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할 계획이다. FT는 "팝마트 제품이 전 세계에서 호평을 받는 건 그들의 캐릭터에 '국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다양한 국가 아티스트들의 창작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중국인 취향을 넘어 글로벌화가 가능했다는 얘기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