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사 ‘처단’ 협박에 굴하지 않은 건
국민이 이겨왔다는 역사를 알기 때문
12·3 내란 교훈으로 미래 이정표 삼길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한국일보 법조기자들은 과거사 사건 취재에 항상 진심이었다. 최근 본보는 ①군 민간인 학살 국가배상 ②거제보도연맹 ③12사단 장교 의문사 ④남민전 사건 등에서 단독 보도를 했다. 형제복지원, 재일동포 최창일씨 간첩 누명, 전두환 정권 프락치 사건 기사도 이어졌다. 과거사 배상 재판의 제도적 문제점을 짚은 기획기사도 연재했다.
기자들이 수십 년 전 일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건 ‘이렇게 자유로운 세상’을 가능하게 했던 선배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압제에 항거한 순국선열, 부조리에 저항한 민주주의 수호자들의 용기와 노력이 널리 알려지는 게 정의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런 고마움은 당시를 경험하지 못한 후배들의 추상적인 공감 정도였을 뿐, 이 시대에 민주주의의 위기가 재연될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사실 과거사 기사엔 불편하다는 댓글이나 반응이 종종 뒤따랐다. ‘옛날 일을 지금 들춰서 뭐 하자는 건가’라거나, ‘좌파를 굳이 치켜세울 필요 있느냐’는 식의 불만이었다.
그런 말처럼 과거사는 정말 과거에서 끝나 사라진 얘기일까. 아니었다. 우리는 윤석열 대통령 덕분(?)에 과거사의 '현재적 가치'를 제대로 느끼는 중이다. 역사책에서나 접하던 비상계엄을 직접 겪으니, 역사가 보이지 않는 굵은 동아줄을 통해 지금 이 순간과 단단히 이어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12월 3일 밤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상황을 돌이켜 보자. ‘박안수’라는, 처음 보는 군인 명의로 무시무시한 포고령이 떨어졌다. 정치활동 금지, 언론·출판 통제, 집회 금지, 전공의 강제 복귀 등 폭압적인 조치였다. 어기면 영장 없이 ‘처단’한다는 협박도 붙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협박에 겁먹지 않고 각자 자리에서 민주주의를 지켰다. 시민들은 여의도로 달려갔고, 기자들은 총 든 군인에게 카메라와 휴대폰을 들이댔으며, 네티즌은 계엄군 출동 사진을 밤새 퍼다 날랐다. 모두 포고령 위반이다.
군인들도 정의의 편에 섰다. 방첩사 장교들은 선관위 서버를 압수하란 명령을 거부했고, 특전사 대원들도 작전 대상이 민간인이란 사실을 알고 사보타주를 하며 충돌을 피했다.
부당한 명령과 포고령에 맞서, 우린 어떻게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앞이 안 보이는 캄캄한 계엄 시국에서 역사가 등불이 되어준 덕분이다. 군사반란을 주도한 전두환 노태우가 결국엔 단죄당하는 장면을 보고, 수십 년 전 불의와 거짓이 재심을 통해 바로잡히는 판결을 반복적으로 접하며, 결국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이 이길 싸움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쿠데타를 막는 진짜 힘은 방첩사의 감시·감청이 아니라, 대다수 국민이 공유하는 독재에 대한 거부감이란 걸 알게 됐다. 그게 역사를 아는 자들이 가진 힘이다. 최고 지도자가 초헌법적 행패를 부려도, 국민이 헌법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이 ‘수준’이야말로 나라의 저력이다.
12·12가 ‘군사반란’으로 기록된 것처럼 12·3은 ‘내란’으로 남을 것이다. 12·3 내란이 대한민국 국운 쇠퇴의 시작점으로 기억될지, 민주주의의 또 다른 도약점으로 남을 것인지가 우리 손에 달려 있다. 한 줌 의혹도 남기지 않는 정치적·사법적 단죄, 철저한 역사적 평가가 필수적이다. 이 순간을 역사책에 또렷하게 기록하며 민주주의가 다시 승리한 기념비를 세워야 한다.
그게 이번 싸움에서 이길 힘을 불어넣어준 선배들에게 보답하는 길이고, 이 순간을 나중에 지켜볼 후손에 대한 예의다. 그런 역사적 평가에서 ‘윤석열’이란 사람의 의미는, 닮지 말아야 할 ‘타산지석’ 역할을 하는 것으로 족하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