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10대 남녀 피겨 유망주도 희생
진보 공격 도구로 비극 활용한 대통령
같은 고도 이유 의문… 30일 내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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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미국 수도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주 북부 ‘페어팩스아이스아레나’ 로비에 전날 여객기·군헬기 충돌·추락 사고로 숨진 이 스케이트장 출신 피겨스케이팅 유망주 등의 사진이 걸려 있고, 테이블에는 추모객들이 두고 간 꽃들이 놓여 있다. 워싱턴=권경성 특파원
30일(현지시간) 오후 7시쯤 미국 수도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주(州) 북부 소재 ‘페어팩스아이스아레나’. 어린이들이 피겨스케이팅에 입문하는 스케이트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날 로비 한편에는 “미국 피겨계에서 전도유망했던 이들의 상실을 애도한다”는 문구 아래 사진 몇 장이 전시됐다. 전날 밤 여객기·군헬기 충돌·추락 사고로 숨진 이들 중 일부다. 총괄 매니저 폴은 본보에 “이곳에서 꿈을 키운 아이들에게 갑자기 닥친 비극이 믿기지 않는다. 슬프고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美 피겨스케이팅계의 비극
전날 사고는 미국 엘리트 피겨 커뮤니티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추락한 여객기 승객 명단에 미국에서 가장 유망한 어린 피겨 선수와 코치 몇 명이 포함돼 있었다고 30일 보도했다. 이들은 20~26일 캔자스주 위치토에서 열린 미국 피겨선수권대회와 연계해 진행된 전국 유망주 대상 훈련 캠프 참가를 마친 뒤 복귀하던 길이었다. 워싱턴과 북버지니아 출신 아동 선수만 적어도 8명이 해당 여객기에 타고 있었다고 신문은 전했다.

30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노우드에 있는 ‘보스턴 스케이팅 클럽’에 전날 여객기·군헬기 충돌·추락 사고로 숨진 이 클럽 소속 선수 지나 한(왼쪽부터)과 스펜서 레인, 이들의 코치인 바딤 나우모프와 예브게니아 슈슈코바 부부의 사진이 전시돼 있다. 노우드=로이터 연합뉴스
희생자 중에는 한국계 10대 남녀 유망주와 러시아 유명 선수 출신 코치도 있었다. ‘보스턴 스케이팅 클럽’ 최고경영자(CEO) 더그 제그히베는 소속 선수 지나 한(여·13)과 스펜서 레인(16)이 모친과 함께 사고기에 타고 있었다고 미국 CBS방송에 밝혔다. 두 선수 모두 한국계이며 레인은 미국인 부모에게 입양된 것으로 확인됐다. 동승한 이들의 코치 예브게니아 슈슈코바와 바딤 나우모프 부부(러시아)는 특급 엘리트였다. 1994년 세계 피겨선수권대회에 나가 챔피언에 오른 적이 있을 정도다.
사고가 발생한 것은 29일 오후 9시쯤이었다. 워싱턴 인근 로널드 레이건 공항에 착륙하려던 아메리칸항공 산하 PSA항공 5342편 여객기가 근처에서 훈련 중이던 미국 육군 헬기 블랙호크와 충돌했고 두 항공기 모두 포토맥강에 추락했다. 여객기에는 승객 60명과 승무원 4명 등 64명이, 헬기에는 군인 3명이 각각 타고 있었다.
이들 67명 전원이 사망했다는 게 당국의 잠정 결론이다. 존 도널리 워싱턴 소방청장은 30일 기자회견에서 “이제 구조 작전에서 (시신 등의) 수습 작전으로 전환하는 시점”이라고 말했다.
희생자 면면뿐 아니라 규모에서도 이번 사고는 미국 역사상 이례적인 항공기 참사다. AP통신에 따르면 2001년 11월 12일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을 출발한 아메리칸항공 여객기가 이륙하자마자 인근 주택가로 추락해 260명 전원이 사망한 이래 인명 피해가 가장 컸다.
왜 헬기는 제한 고도를 어겼나

도널드 트럼프(뒷모습) 미국 대통령이 30일 미 워싱턴 백악관 브리핑룸에서 취재진을 상대로 전날 여객기·군헬기 충돌·추락 사고 관련 회견을 하고 있다. 워싱턴=AP 뉴시스
워싱턴 정가 관행에 거부감을 드러내 온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비극 앞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이날 집권 2기 첫 백악관 브리핑룸 기자회견을 묵념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조 바이든 행정부의 대표적 진보 정책인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프로그램을 모든 연방기관에서 없애 버리겠다는 본인 정치 의제로 화제를 바꾸는 데에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재임 때 마련된 항공 안전 인력 채용 기준을 집권 1기 당시 자신이 상향했지만 전임자인 바이든 전 대통령이 그 기준을 역대 최저 수준으로 낮췄다고 비난했다. 그는 “연방항공청(FAA)의 (채용 관련) 다양성 추진에는 심각한 지적·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중점을 두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여야 상관없이 트럼프 대통령이 비극을 정치화하고 있다는 힐난이 나왔다고 미국 워싱턴포스트가 전했다.
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무게를 실은 사고 원인은 군헬기 조종사의 실수다. 그는 “헬기는 (여객기를 피하기 위해) 수백만 가지 다른 기동을 할 수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냥 그대로 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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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미국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주 알링턴에 있는 로널드레이건공항 근처 포토맥강에서 구조대가 전날 여객기 추락 현장을 수색하고 있다. 알링턴=AP 뉴시스
특히 의문이 제기되는 대목은 여객기와 헬기가 같은 고도로 비행한 사실이다. 미국 국가교통안전위원회(NTSB) 조사관을 지낸 그레그 페이스는 30일 CNN 인터뷰에서 200피트(약 60m) 아래로 날도록 돼 있는 군헬기가 제한 고도보다 근 200피트 높이 비행한 이유가 규명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 회견에 배석한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실수가 있었다”고 말했다.
관제사 부족이나 헬기 비행이 잦고 혼잡한 공항 등도 미국 언론이 짚고 있는 사고 배경이다. 사고 조사를 맡는 NTSB는 30일 내로 예비 보고서를 작성할 계획이다. 제니퍼 호멘디 NTSB 위원장은 “사람, 기계, 환경을 조사할 것”이라고 30일 말했다. 기계 결함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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