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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남의 땅’이던 114년 동안 용산기지엔 아픈 역사가 흘렀다

입력
2019-04-10 18:00
9일 서울 용산 주한미군기지내의 한미연합사령부. 이곳은 한·미 부대의 작전통제를 위한 조직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은 1970년대 한국 근대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어 중요도가 높은 건축물이다. 연합뉴스
9일 서울 용산 주한미군기지내의 한미연합사령부. 이곳은 한·미 부대의 작전통제를 위한 조직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은 1970년대 한국 근대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어 중요도가 높은 건축물이다. 연합뉴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 용산 미군기지엔 용산(龍山)이 없습니다. 실제 미군기지의 줄기를 이루는 건 둔지산(屯地山)이죠. 그런데 왜 사람들은 둔지산을 잘 모를까요. 바로 (기지 내에) 일반인 접근이 안되다 보니 존재 자체가 인식되지 않은 겁니다(김천수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실장).”

부지 규모만 243만㎡. 축구장 340개 크기로 여의도 면적에 맞먹지만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 서울 중심지에 있다. 바로 용산 미군기지다. 용산 기지는 일제가 1904년 8월 경술국치와 함께 용산 일대를 군용지로 강제 수용한 이후 오랜 세월 일본, 미군 등 외국군의 군사기지로 사용돼 왔다. 114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돼 온 용산기지는 서울 한복판에 있지만 시민들이 다가갈 수도, 무엇이 있는지 알 수도 없는 ‘금단의 땅’이자 현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장소다.

◇지난해부터 용산기지 버스투어 시작

1990년 6월 한미 정부는 2003년 5월 용산기지를 평택으로 이전한다는 내용의 기본합의서와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2005년 10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용산기지의 국가공원 추진 방향을 발표했다. 국가공원화 결정 이후에도 미군이 사용 중인 군사시설이란 이유로 지난해까지 국민들은 용산기지를 직접 들어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군의 부지 반환 이전이라도 국민들이 직접 살펴보고 체험할 기회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커지면서 정부는 지난해 11월 114년 미지의 공간이었던 이곳을 일부 개방하고 버스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투어는 사전 예약한 시민들이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기지의 주요 거점에 하차해 둘러보는 형태로 진행된다.

9일까지 총 16회가 실시됐으며 그간 700여명이 다녀갔다. 국토교통부는 이달부터 매회 1대에서 2대로 차량을 증편해 확대 시행한다. 이달부터 6월까지 총 14차례의 버스투어가 예정돼 있다. 지난 9일 국토교통부 출입기자들은 시민 60여명과 함께 미군의 협조를 얻어 용산 미군기지 버스 투어에 참가했다.

투어는 용산기지의 총 24개 게이트 중 14번 게이트로 들어가 SP벙커(일본군작전센터)→위수감옥(일본군 감옥)→둔지산 정상→주한미군사령부→만조천→일본군 병기지창→드래곤힐호텔 등으로 이동하는 코스로 진행됐다.

9일 용산미군기지 버스투어에 참가한 시민들이 위수감옥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9일 용산미군기지 버스투어에 참가한 시민들이 위수감옥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금단의 땅에 배어있는 아픈 역사의 현장들

114년간 일제와 미군이 주둔했던 만큼 기지 내에는 미군 시설뿐 아니라 일제 시대의 군사시설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사우스포스트(SP) 벙커는 일제강점기 일본군 방공작전실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광복 이후 미 7사단 벙커로 사용되다가 한국전쟁 직전까진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국 작전상황실로 사용됐다. 한국전쟁 때는 이곳에서 한강철교 폭파가 결정되기도 했다.

SP벙커에서 현재 주한미군 121 종합병원으로 사용되는 총독관저 터를 지나면 빨간 벽돌로 만들어진 담장이 보인다. 담장 안을 들어서면 역시 빨간 벽돌로 만들어진 위수감옥이 나타난다. 현재 국내에 남은 유일한 일본군 감옥이다. 광복 이후에는 육군형무소로 사용됐지만, ‘장군의 아들’로 알려진 김두한과 백범 김구 암살범인 안두희도 이곳에 수감된 적이 있었다. 최근까지는 미군 의무부대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투어 관람객을 위한 임시 화장실로 개조된 상태다.

건물 담장 곳곳에는 이곳이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였음을 보여주는 탄환 자국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미군이 이용하긴 했지만 건물 곳곳에는 일제의 잔재도 여전했다. 위수감옥 빨간벽 아래에 있는 환기구 덮개는 일제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별 문양으로 돼 있고, 당시 감옥 내 시신을 밖으로 운반했던 문의 형태도 그대로 남아있다.

9일 김천수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실장이 서울 용산미군기지 내 위수감옥에서 시신을 밖으로 운반하던 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국토교통부 제공
9일 김천수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실장이 서울 용산미군기지 내 위수감옥에서 시신을 밖으로 운반하던 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국토교통부 제공

용산 일대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둔지산 정상을 지나 1970년대 지어진 한미연합군사령부 건물 뒷편으로 이동하면 만조천이 흐른다. 청계천 등 서울시내 대부분의 계천이 1960년대 이후 복개된 것과 달리 만조천의 용산기지 내부 약 300m 구간은 복개되지 않았다. 그간 외부에 공개되지 않아 개발에서 비껴나 있다 보니 ‘서울에서 유일하게 복개되지 않은 하천’으로 남은 셈이다.

만조천 변부터 기지 밖으로 나가는 게이트까지는 왕복 2차선 도로로 이어져 있는데 이 길을 따라 왕벚나무가 빼곡히 심어져 있다. 이는 일제가 이곳에 군사기지를 만들면서 벚나무를 많이 심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해군기지가 있던 경남 진해에 벚나무가 많은 것과 비슷한 이유다. 김천수 실장은 “일제강점기 때 이 길을 통해 군인들의 입영이 이뤄졌고,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 전쟁 때도 이 길을 따라 기지를 출입하며 행진했다”며 “조선청년들이 (전쟁의) 총알받이로 가던 가슴 아픈 역사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벚꽃길의 한쪽엔 병기지창이 있다. 병기지창은 1908년 완공돼 일본군의 무기와 탄약을 보관하던 곳으로, 지금은 미군 공병대와 시설대가 들어서 있다. 현재도 원형이 그대로 보존돼 당시 일본의 건축문화를 잘 보여준다. 여자친구와 함께 투어에 참여한 이모(27)씨는 “용산기지는 미군이 주둔하면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일제강점기 때부터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며 “공원으로 만들더라도 중요한 장소는 남겨 역사의 현장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9일 용산미군기지 버스투어 참가자들이 서울에서 유일하게 복개되지 않은 하천인 만초천을 둘러보고 있다. 뉴스1
9일 용산미군기지 버스투어 참가자들이 서울에서 유일하게 복개되지 않은 하천인 만초천을 둘러보고 있다. 뉴스1

◇공원조성에 기존 시설 81동 존치 전망

현재 용산기지는 대규모 국가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한 사업이 추진 중이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도 대선 공약에서 용산기지 터를 미국 뉴욕의 센트럴파크와 같은 생태자연공원으로 조성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용산공원 조성 공사는 미군 부대의 평택기지 이전 후 토양 오염 조사와 정화 등을 거친 뒤 착공해 2027년 완료할 예정이다.

용산공원의 기본설계와 공원조성계획을 위해 국토부는 지난해 말까지 연구용역을 진행했다. 용역은 네덜란드 조경기업 웨스트에이트와 한국의 건축사무소 이로재가 컨소시엄을 구성해 진행했는데, 이들이 지난해 말 내놓은 연구용역 결과를 통해 향후 용산공원의 밑그림을 유추해볼 수 있다. 용역안에는 현재 용산기지에 있는 975동의 건물 가운데 역사적으로 보존 가치가 있는 81동은 존치, 53동은 철거 여부 판단 보류(추후 검토), 나머지는 철거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존치와 철거 기준은 △역사문화적 가치 여부 △지형과의 조화 △공원운영관리상 필요성이 될 전망이다. 공원 가운데 대규모 호수를 만들고 메인 포스트와 사우스 포스트 지역 사이에 구름다리를 놓는 방안도 용역 결과에 포함됐다.

국토부는 이 결과를 참고해 하반기 본격적인 국민 여론 수렴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국토부 용산공원 추진기획단 관계자는 “이는 외부 용역결과일 뿐 이대로 공원이 조성된다는 의미는 아니다”라며 “하반기 대국민 여론수렴을 통해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9일 서울 용산 주한미군기지에서 장병들이 벚꽃이 활짝 핀 길을 걷고 있다. 연합뉴스
9일 서울 용산 주한미군기지에서 장병들이 벚꽃이 활짝 핀 길을 걷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