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美낙태금지법 거센 후폭풍… "빈곤여성 직격탄" 지적에 공화당 역풍 조짐도

입력
2021-09-07 20:00
1일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의 주의회 의사당 앞에서 여성들이 이날부터 시행된 임신중단 금지법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오스틴=AP 연합뉴스

1일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의 주의회 의사당 앞에서 여성들이 이날부터 시행된 임신중단 금지법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오스틴=AP 연합뉴스

거센 논란 속에 이달부터 시행에 들어간 미국 텍사스주(州)의 낙태(임신중단) 금지법이 야기한 후폭풍이 심상치 않다. 기본권을 침해당한 여성들의 반발이 갈수록 확산되는 데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있는 유색인종 여성의 빈곤을 심화시킬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며 비판의 층위도 넓어지고 있다.

심지어 해당 법을 옹호하고 있는 공화당에서도 역풍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임신중단권 제한의 정당성을 보수 성향 유권자들에게 호소하고 있지만, ‘(민주당 성향이 아닌) 중도층과 여성 유권자가 돌아설 수 있다’며 반작용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텍사스주를 향한 조 바이든 행정부의 공세도 본격화하는 가운데, 공화당이 수세에 몰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경제적 여유 없으면 '원정진료'도 불가능"

6일(현지시간) AP통신과 CNN방송 등 미 언론들에 따르면, 텍사스에선 이미 많은 여성들이 주 경계를 넘어 ‘원정 진료’에 나서고 있다. 태아의 심장박동이 감지되는 6주 이후 임신중단을 금지한 주법을 피해, 규제가 상대적으로 약한 다른 주에서 시술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는 셈이다. 통신은 “법 시행 직후부터 텍사스 인근 주의 병원들에는 평소보다 2배 많은 예약 상담 전화가 폭주하고 있고, 밀려드는 환자로 의료진을 추가 채용하는 곳도 있다”고 전했다. 통상 임신부가 자신의 임신 사실을 인지하는 시기는 9주쯤이라는 점에서, 텍사스 법은 ‘사실상 임신중단 전면 금지를 노린 것’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미국시민자유연합은 텍사스주 역시 임신중단 여성 85~90%가 임신 6주 이후 시술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조사 결과를 공개하기도 했다.

여성 기본권을 크게 후퇴시킨 텍사스 주법의 시대착오적 성격과는 별개로, 또 다른 문제 중 하나는 ‘원정 진료’를 현실적 대안으로 보기도 힘들다는 점이다. 이를 선택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없는 여성들도 많기 때문이다. 여성의 재(再)생산권을 연구하는 비영리단체 구트마허연구소는 “임신중단 시술을 받으려는 텍사스 여성들의 이동 거리는 과거엔 19㎞ 정도로 족했으나, 이제는 평균 399㎞까지 늘어났다”고 분석했다. 생업에 묶여 돈도 시간도 없는 여성들에겐 하늘과 땅만큼이나 먼 거리다.

텍사스대 정책평가프로젝트는 “새로운 법으로 인해 향후 텍사스주에서 임신중단을 원하는 여성 10명 중 8명이 강제로 임신을 유지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도 과거 “의도하지 않은 임신은 교육과 취업 기회를 박탈하고, 아이의 건강을 해치며, 빈곤 상태에 놓이게 할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텍사스 주법이 사실상 ‘원치 않는 출산’을 강요하게 될 위험성이 크다는 의미다.

미 NBC방송은 “특히 백인에 비해 저소득층 비율이 높은 흑인과 라틴계 등 유색인종 여성들에게 타격이 크다”고 지적했다. 법 자체가 성차별적일 뿐 아니라, 인종차별적이라는 비판까지 나오는 이유다. 임신중단권 옹호단체인 아피야센터 마샤 존스 국장은 “아이를 돌볼 수 없는 사람에게 아이를 낳도록 강요하는 시스템만 있고 아이를 돌보도록 지원하는 시스템은 없다면, 결국 빈곤은 대물림된다”며 “가난한 사람과 유색인종한테만 빈곤을 영구화하는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그레그 애벗 미국 텍사스 주지사가 6월 8일 오스틴에 위치한 주의회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오스틴=AFP 연합뉴스

그레그 애벗 미국 텍사스 주지사가 6월 8일 오스틴에 위치한 주의회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오스틴=AFP 연합뉴스


텍사스 주지사 지지율 폭락... 바이든 정부도 '총공세'

임신중단 금지법이 궁극적으로는 공화당에 부메랑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연방하원 윤리위원장을 지냈던 찰리 덴트 전 공화당 의원은 CNN방송에서 “아프가니스탄 문제와 관련해 민주당에 공세를 펴야 할 시점에 텍사스주 공화당은 다른 주의 공화당원들에게 (같은 법안을 마련하라는) 채찍질을 가하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그는 “공화당이 민주당한테 2022년 중간선거에서 성별 격차 문제를 무기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한 꼴이 됐다”며 “의회에 몸담았던 14년간 임신중단 금지를 의제로 내세워 선거에서 이기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고 꼬집었다. 공화당의 ‘역주행’을 직격한 것이다.

실제로 그레그 애벗(공화당) 텍사스 주지사의 지지율도 하락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난달 20~30일 텍사스대가 그의 직무 수행 지지도를 조사한 결과, 임기 중 최저인 41%로 나타났다. 특히 무소속 유권자층에서 지지율은 지난 6월 41%에서 30%로 폭락했다. 임신중단 금지법 시행 전 실시된 조사이긴 하지만, 정치권에 큰 파문을 몰고 온 ‘투표제한법 강행’ 등 보수 일변도 정책에 대한 유권자의 강한 거부감을 확인할 수 있는 결과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예고했듯, 연방정부도 정면 대응에 나섰다. 메릭 갈런드 미 법무장관은 이날 “임신중단을 결정한 텍사스 거주 여성, 의료시설 및 보건소가 공격받거나 방해받지 않도록, 연방 법 집행기관이 ‘의료시설 접근 자유법’을 근거로 지원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1994년 시행된 이 법은 임신중단 등 의료 서비스 수요자 또는 공급자를 해치거나 방해하는 물리적 방해, 무력 위협·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갈런드 장관은 “텍사스에 있는 법무부 기관, 연방수사국(FBI) 지역사무소와 논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표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