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세가 심상치 않다. 신규 확진자와 사망자 수는 가파르게 늘면서 연일 최고치를 갈아치우고 있다. 반면 백신 접종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만연한 불신 탓이다. “백신 접종이 실패했다”는 친(親)정부 고위 인사의 자조가 나올 정도다. 그러나 정부가 백신 이외의 방역 조치에는 손을 놓으면서 다시 시작된 증가세가 본격적인 ‘4차 유행’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18일(현지시간) 러시아 국영 타스통신에 따르면, 현지 코로나19 위기대응센터는 지난 24시간 동안 신규 확진자가 3만4,325명 발생해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 최다치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지난달 18일 일일 확진자 수가 2만 명 수준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한 달 만에 72%에 가까운 폭등세다. 이날 숨진 사람도 998명에 달했다. 일일 최다 사망자가 나왔던 이틀 전(1,002명)보다는 다소 줄었지만, 여전히 1,000명 안팎을 오가는 상황이다.
가파른 확산세와 높은 사망률 뒤에는 ‘불신’이 있다. 코로나19 백신은 물론, 정부도 국민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다는 얘기다. 현재 백신 접종을 끝낸 러시아인은 4,200만 명으로, 전체 인구(1억4,600만 명)의 29% 정도다. 국민 3명 중 1명에도 못 미치는 셈이다. 러시아 독립 여론조사기관 레바다센터의 최근 조사에서 국민의 절반가량(52%)은 “백신 접종에 관심이 없다”고 답했다.
‘당근책’도 소용없었다. 정부가 복권과 현금, 쿠폰 등 각종 인센티브를 뿌리고, 자체 개발 백신인 스푸트니크V가 안전하다고 연일 강조해도 효과를 보지 못했다. 시민들의 발길은 여간해선 백신 접종 장소를 향하지 않았다. 이날 표토르 톨스토이 러시아 연방하원 부의장은 친정부 성향 방송에 출연해 “불행히도 우리는 코로나19에 대한 정보 캠페인을 잘 하지 못했고, (통제력을) 완전히 잃었다”며 “사람들에겐 백신 접종에 대한 신뢰가 없다”고 꼬집었다. 사회인류학자 알렌산드라 아르키포바 박사도 “스푸트니크V가 미국 또는 세계보건기구(WHO)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데다, 화이자나 모더나 등을 러시아에서 구할 수도 없는 탓에 백신 접종에 회의적인 분위기”이라고 설명했다.
믿음을 잃은 대상에는 정부 역시 포함돼 있다. 러시아 당국이 코로나19 관련 통계를 조작하고 있다는 건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러시아는 공식적으로 이달 중순까지 사망자가 22만1,313명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전날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는 인구학자 알렉세이 락샤 등의 분석을 인용해 “이미 사망자 수가 75만 명을 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심지어 같은 정부 기관 사이에서도 통계가 엇갈린다. 예컨대 러시아 통계청은 지난 15일 “8월 한 달간 4만3,500명이 코로나19로 숨졌다”고 공표했지만, 또 다른 기관인 위기대응센터는 사망자가 2만5,000명이라고 발표했다. 두 배 가까운 격차에 ‘통계 조작설’에는 더 힘이 실렸다. 레바다센터 조사 당시에도 10명 중 4명이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감염병 상황이 그야말로 살얼음판인데도, 정부는 백신 접종 독려 외엔 별다른 방역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당장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의료, 교육 등 일부 분야를 제외하고는 백신 접종 의무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영업 제한이나 거리 두기 강화, 봉쇄조치는 머나먼 얘기다. ‘경제 정상화’가 급선무인 탓에 시민들의 발을 묶을 수 없다는 이유다.
결국 일부 지역은 자체적으로 확산 방지 조처에 나섰다. 이날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QR코드 형태의 디지털 백신 증명 코드를 도입하기로 했다. 다음 달부터는 이 코드가 없으면 경기장과 극장, 수영장, 체육관 등 입장이 금지된다.
중앙정부의 무관심 속에 러시아 코로나19 확산세는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빅토르 자하로프 상트페테르부르크대 교수는 자체 개발한 수학 모델을 활용, 사망자와 회복 환자를 제외한 누적 확진자 수가 현재 78만 명에서 2주 뒤인 11월 초에는 100만 명 문턱을 넘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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