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오미크론 변이’ 등장과 함께 백신 지식재산권 면제 요구가 다시 거세지고 있다. 백신 없이 무방비 상태로 감염병에 노출된 빈국에서 새 변이가 출현함에 따라 재점화한 ‘백신 불평등’ 논란이 그 해법 중 하나인 ‘백신 지재권 면제’ 논의로 옮겨 붙은 셈이다. 델타 변이가 원조를 밀어내고 단숨에 우세종이 됐듯, 오미크론 변이는 이미 발원지인 남아프리카를 넘어 지구촌 곳곳으로 침투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백신이 필요한 곳에서 백신을 직접 만드는 것”이 가장 확실한 해결책이라고 입을 모은다.
사실 백신 지재권 면제 문제는 본격 논의를 앞둔 상태였다. 30일(현지시간)부터 내달 3일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의 핵심 의제였다. 그러나 오미크론 변이 차단을 위해 유럽 각국이 남아프리카발(發) 입국을 제한하면서 회의도 무기한 연기됐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유럽은 28일 “결과적으로 오미크론 변이가 백신 지재권 면제 논의를 막아 세웠지만, 그와 동시에 빈국에 백신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더 커졌다”고 평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 분석 결과, 백신 생산 물량의 89%는 주요 20개국(G20)이 독점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백신 공동구매·배분기구 ‘코백스’가 확보한 물량은 목표치였던 20억 개 중 3분의 2에 불과하다. 유럽이 백신 접종률 70%를 달성하는 사이, 아프리카는 6~7%를 맴돈다. ‘백신 아파르트헤이트(남아공의 과거 인종분리 정책)’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옥스팜과 국제엠네스티 등 국제비정부기구 70여 곳으로 구성된 백신 연대 ‘피플스 백신(People’s Vaccine)’은 “WTO 회의 연기는 결코 불가피하지 않았다”며 “‘백신 아파르트헤이트’ 책임은 백신 지재권 협상을 연기한 부국들과 WTO에 있다”고 일갈했다.
그럼에도 백신 지재권 면제 합의는 여전히 난망하다. 올해 5월 미국이 ‘지재권 면제 지지’를 선언했으나, 유럽연합(EU)과 글로벌 제약업계는 완강히 반대하고 있다. 폴리티코유럽에 따르면 이번 WTO 회의를 앞두고 EU 집행위원회는 보건·방역 위기 상황에서 개별 국가들이 강제로 치료제나 백신 복제품을 만들 수 있는 ‘강제실시권’만 허용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하지만 강제실시권이 발동된 적은 거의 없다. 무역 제재나 특허권 침해 소송 우려 탓이다. EU 방침은 한마디로 지재권 보호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사라 마티외 유럽의회 의원은 “EU는 국민 건강을 제약사의 이익보다 우선시해야 한다”고 했고, 캐슬린 반 브렘트 의원도 “유럽은 지재권 포기를 방해하는 행위를 멈추고, 백신 기술을 필요로 하는 모든 곳과 공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지재권 문제가 풀리지 않는 한, 백신 불평등도 지속될 수밖에 없다. 향후 공급될 물량의 71%는 부국에 할당돼 있다. 게다가 오미크론 변이 대처를 위해 부국들이 부스터샷 접종에 박차를 가하면 빈국은 더욱 극심한 백신 빈곤으로 내몰리고, 신종 변이 출현도 무한 반복될 공산이 크다. 실제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오미크론 변이에 대한 최선의 전략으로 ‘부스터샷 확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는 전했다.
코로나19 백신 제조사 중 한 곳인 모더나는 이날 “오미크론 변이에 대한 예방 능력이 있는 백신을 내년 초쯤 출시해 대량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뒤집어 말하면, ‘가난한 나라’ 입장에선 한동안 오미크론 변이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의미다. 리처드 해쳇 감염병혁신연합 대표는 “팬데믹은 우리가 구축한 보건 시스템과 백신 제조 방식이 세계를 위해 공평한 결과도, 심지어 효율적인 결과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냈다”며 “세계는 반드시 이 문제를 논의해야만 한다”고 지적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