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와 샤넬, 루이비통 등 명품 브랜드들이 러시아에서 일시적으로 매장 문을 닫는다고 발표했지만 어쩐 일인지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규탄하는 국제사회의 분위기에 동참한다기보다 어쩔 수 없는 운영 상의 어려움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LVMH(루이비통모에헤네시)그룹과 케링그룹, 에르메스, 샤넬 등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4곳을 포함해 프라다, 버버리 등은 최근 러시아에서 온라인 판매를 중단하고, 잠정적으로 매장을 폐쇄하겠다고 밝혔다. LVMH그룹은 루이비통과 디올, 불가리 등을 소유한 세계 최대 명품 브랜드 기업이며, 케링그룹은 구찌와 생로랑, 보테가베네타 등을 소유하고 있다.
이들은 이미 러시아에서 사업 중단 선언을 한 패션 브랜드 H&M, 자라 등의 이른 결정에 합류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셈이다.
그러나 영국 BBC 방송 등 해외 언론들은 이들 명품 브랜드의 결정을 두고 "자발적 혹은 이타적으로 내린 결정이 아니"라고 비판하고 있다. 11일(현지시간) BBC는 "샤넬과 버버리 등은 단순히 매장을 일시적으로 폐쇄하면서 '중단한다'고 밝히는 이유가 러시아는 유럽에서 5번째로 큰 시장이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이탈리아의 야후 파이낸스도 "지적하고 싶은 것은 명품 브랜드가 러시아에서 일시적으로 매장 패쇄 결정을 내린 건 현지 영업이 어려움에 직면해서다"고 지적했다.
사실 유럽 곳곳에서 명품 브랜드들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유가 있다. 미국과 EU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대러 제재 대상에서 럭셔리 사치품, 즉 명품 브랜드를 제외했다. 이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뿌리를 둔 명품 브랜드들이 러시아에 합법적으로 제품을 수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각에선 럭셔리 제품이 제재 대상에서 빠진 것을 두고 의혹을 제기했다. 일부 명품 브랜드가 유럽의 큰 손 중 하나인 러시아에 수출 활로가 막힐까봐 로비를 펼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돌았다. 그만큼 명품 브랜드가 러시아 시장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의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러시아를 중심으로 간신히 되살아난 유럽의 명품 시장이 다시 흔들릴 수 있어서다.
러시아의 명품 시장은 지난해 3,372억 파운드(약 554조 원)의 가치로 평가받는다고 BBC는 전했다. 전 세계에서 5번째로 큰 유럽 시장이라는 것이다. LVMH그룹도 러시아 전역에 120여 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명품 브랜드들은 유럽과 미국이 러시아에 경제적 제재를 가하자 직접 영향을 받게 됐다. 우선 러시아 금융기관에 대한 스위프트(SWIFT·국제금융통신망) 퇴출로 인해 당장 아멕스, 비자, 마스터카드 등 신용카드 업체들이 줄줄이 러시아에서 철수해 거래가 차단됐다.
또 DHL이나 페덱스 같은 배송업체들도 선적 제재로 인해 물품을 러시아로 반입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됐다.
이에 따라 명품 브랜드들이 그야말로 '울며 겨자 먹기'로 "영업 잠정 중단"을 선언했다는 얘기다. 러시아에서 사업을 철수하거나 완전히 중단하지 않은 건 만약 나중에 돌아갈 기회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라고 BBC는 전했다. 장기적으로 러시아 고객들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명품 브랜드들의 일시적 매장 폐쇄는 여론의 눈치를 본 것도 있다. 명품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는 SPA브랜드가 일찌감치 러시아 내 영업을 중단한다고 발표해서다. 러시아에 502개 매장을 둔 H&M과 자라를 운영하는 스페인의 인디텍스는 2일 영업 중단 선언을 했다. 나이키도 현재 러시아 고객들에게 물건을 배송하는 것을 보장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여론을 무시할 수 없는 게 기업의 숙명이다. 일본 브랜드 유니클로는 자국민에게 엄청난 지탄을 받은 뒤에야 영업 중단을 선언했다. 많은 패션업체들이 사업 철수를 내거는데 유니클로는 영업을 이어갔다. 유니클로를 운영하는 패스트리테일링의 야나이 타다시 회장은 "옷은 생활 필수품이며, 러시아인들도 우리 똑같은 삶을 살 권리가 있다"며 러시아에서 매장을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러시아는 유니클로가 사업을 확장하며 공을 들이는 곳이다. 2020년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신규 매장 3곳을 오픈했고, 유럽 최대 규모 매장도 모스크바에 있다. 유럽에서 가장 많은 매장(50여 개)을 러시아에서 운영 중이기도 하다. 쉽사리 매장 폐쇄를 결정할 수 없었다.
그러자 일본 내에서 "일본의 수치다" "부끄럽다" 등 비난 여론이 일었다. 국제적으로 러시아의 침략을 규탄하는 분위기 속에서 유니클로가 엇박자 행보를 이어간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유니클로의 고집도 꺾이고 말았다. 10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 등에 따르면 패스트리테일링은 성명을 내고 "인권을 침해하고 평화를 위협하는 모든 형태의 침략을 규탄한다"며 러시아 사업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다른 SPA브랜드들이 러시아에서 빠르게 발을 뺀 상태에서 유니클로가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다.
맥도날드 역시 여론에 등 떠밀려 결정을 내린 경우다. 8일 러시아 내 850여 개 매장 영업을 일시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맥도날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에도 러시아 내 사업 운영 입장을 밝히지 않아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결국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온라인 상에 맥도날드에 대한 '불매운동'이 확산했다. 주식시장에서도 러시아에서 계속 이익을 얻는 것에 불만을 품은 주주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결국 영업 중단 의사를 밝힌 맥도날드를 따라 스타벅스, KFC, 피자헛, 코카콜라, 네슬레, 유니레버 등 식품기업들이 줄줄이 성명을 통해 러시아 내 영업 중단을 선언했다. 혹시라도 불매운동의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몰라 내린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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