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혀끝에서 나온 단 '4초'의 말 한마디가 대한민국을 끝도 없이 집어 삼킨 열흘이었다.
국민들은 너무나 자연스레 튀어나온 비속어가 부끄러워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고, "바이든"과 "날리면"의 발음을 애써 구분해 보느라 무한반복 청력테스트에 시달렸다. 난리통을 지날수록 분노는 차곡차곡 쌓이고 있지만 억지와 윽박이 더 큰 화를 부르고 있을 뿐, 사과는 아직이다. 대통령의 말이 국민을 향한 칼이 돼 아프게 찌르고 할퀴는 형국이다.
말에서 시작해 말로 끝나는 게 정치다. 말은 정치인의 생각과 철학, 진심을 전달하는 최초이자 최후의 창구다. 말 없이는 반대편을 설득할 수 없고, 국민과도 소통할 수 없다. 그래서 정치인은 말로 흥할 수도 있지만, 망할 수도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속어 파문으로 '후자'의 사례들이 새삼 '강제소환'되고 있다.
거친 언어 습관부터, 감수성 떨어지는 부적절한 망언, 위기모면용 거짓말까지.
최고 권력자를 흔들고 때로는 무너뜨렸던 '설화(舌禍) 3종 세트', 그 말말말들을 모아 봤다.
윤 대통령의 비속어 파문이 불거진 뒤 대통령실은 "사적 대화"라고 방어막을 쳤다. 그러나 대통령 직을 맡은 이상 공사 구분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대통령의 모든 말은 역사에 남는 공적 기록이다.
그래서 대통령의 언어는 정제되고 다듬어지기 마련이다. 대통령의 언어 '품격'을 따졌을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은 '파격'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돼서도 진솔하고 투박한 일상어를 많이 썼다. '대통령의 말'과 '서민의 말'이 따로 있지 않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런 아내를 버리면 대통령 자격이 생깁니까?", "기분 나쁜 대통령의 시대는 제가 끝내겠습니다." 간결하고, 담백하고, 무엇보다 쉬운 말은 가슴을 울렸다.
다만 솔직함이 지나친 건 문제였다. "대통령 못해 먹겠다", "막 하자는 것이지요?" '대통령 노무현'의 거친 화법은 국민들에게 불안한 리더십으로 다가왔다. 나라와 국민을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대통령의 말은 내용은 물론 형식도 빈틈이 없어야 했다.
국민적 상식, 눈높이와 동떨어져 있는 '망언'에 발목 잡힌 대통령 사례도 여럿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한나라당 대선 후보 시절 낮은 성인지 감수성을 드러내는 발언으로 문제가 됐다. 이른바 '마사지걸 발언'이다.
2007년 8월 중앙일간지, 통신사 편집국장 등 약 10명과 저녁 식사 자리에서 폭탄주를 마신 이 후보는 "마사지걸이 있는 곳을 갈 경우 덜 예쁜 여자를 고른다더라. 덜 예쁜 여자들이 서비스도 좋기 때문"이라고 말해 논란이 일었다.
여성단체들은 즉각적인 사과를 요구했지만, 이 후보 측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기회가 주어져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취지"라는 허무맹랑한 반박을 내놨다가 반발을 더 키웠다. 이 후보 본인도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현대건설 근무 시절 외국에서 오래 근무한 선배가 한 이야기를 전했을 뿐인데, 무작정 사과하라는 것은 정치적"이라며 적반하장 태도를 보였다.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도 '음담패설' 녹음 파일이 공개되며 지지율이 꺾이기도 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이 있듯, 사람의 사고와 철학, 세계관은 말에서부터 탄로 난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나는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관련이 없습니다.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I'm not a crook)."
1973년 11월 17일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대국민 기자회견을 열고 워터게이트 사건과 무관하다며 '결백'을 호소, 반전을 노렸다. 하지만 이미 국민들의 마음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워터게이트 진상을 은폐 축소하려는 조직적 시도가 드러난 와중에도, 끝내 진실을 말하거나 사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라는 말에 국민들은 그를 '사기꾼'으로 낙인찍었다.
기자회견 이후에도 닉슨의 거짓말은 속속 들통났고, 1974년 8월 대통령이 직접 워터게이트 수사를 방해하라고 지시하는 내용의 녹음 테이프가 '스모킹건'이 됐다. 탄핵 직전까지 몰린 닉슨은 결국 대통령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워터게이트 시작은 불법 도청이었지만, 닉슨의 재선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닉슨을 몰락시킨 것은 사건 그 자체보다 거짓말이었다. 실수는 봐줄 수 있지만, 거짓말은 용서할 수 없다는 국민들의 '분노 포인트'를 제때, 짚어내지 못한 패착이었다.
'국정농단' 사태로 헌정 사상 초유의 탄핵을 부른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거짓말로 화를 더 키웠다. 대국민담화에서 박 전 대통령은 "최순실로부터 연설문 일부를 도움 받았다"고 사태를 축소시켰지만 최씨의 국정개입은 전방위적이었다.
설화를 돌파하려면 '정공법'이 필요하다. 말실수를 했다면 빠르게 인정하고 깔끔하게 사과하는 게 상책이다. 거짓은 거짓을 낳기 마련이고, 거짓이 쌓일수록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국정의 마비다.
그러나 윤 대통령과 여권은 한참을 돌아가는 먼 길을 선택했다. "정언유착", "동맹훼손", "가짜뉴스" 프레임으로 야당과 언론 탓만 하고 있다. 일각에선 윤 대통령이 '강공법'을 택한 배경을 두고, "우리가 남이가"로 잘 알려진 '초원복집' 사건 대응을 벤치마킹하고 있는 거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1992년 대선을 일주일 앞두고 터진 초원복집 사건은 여당인 민자당 참모들이 김영삼 후보 당선을 위해 대놓고 지역감정을 부추기자고 모의한 녹음파일("우리가 남이가", "지역감정이 유치할진 몰라도 고향 발전엔 도움이 돼",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일으켜야 돼")이 공개되면서 불거졌다.
노골적으로 지역주의를 조장하는 선거전략이 문제였지만, 여당과 일부 보수 성향 언론들은 야당이던 통일국민당의 '불법 도청'을 문제 삼으며 국면전환을 시도했고, 결과적으로 김영삼 후보가 영남권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며 '되치기'에 성공했다.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를 공격하는 전략이 윤 대통령의 비속어 파문 대응과도 닮아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정권의 의도대로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1992년엔 언론과 정보를 통제하는 게 어느 정도 가능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2022년이다. 프레임을 짤수록 역풍이 불 수 있다.
당장 비속어 파문 여파로 윤 대통령의 지지율이 24%까지 고꾸라져, 취임 이후 최저치를 찍었다는 여론조사도 발표됐다. (▶'비속어 논란' 영향 미쳤나...尹 지지율 또 24% 최저치[한국갤럽]) 대통령의 말이, 칼이 돼 국민을 아프게 하는 걸 넘어 대통령 본인을 찌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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