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꺼내 얘기해 보는 '다시 본다, 고전'이 두 번째 시즌을 엽니다. 다수의 철학서를 펴내고, 한국상담대학원 대학교 문학상담 교수이기도 한 진은영 시인이 <한국일보>에 4주마다 토요일에 글을 씁니다.
1902년 늦가을,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육군 사관생도 카푸스는 밤나무 그늘 아래서 릴케의 시집을 읽고 있었다. 그때 교목을 맡고 있던 교수가 다가와 릴케가 사관학교를 다니다 중퇴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얼마 후 카푸스는 출판사를 통해 알아낸 주소로 무작정 릴케에게 편지를 썼다. 자신의 습작시와 함께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속마음을 적어서.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서신 교환은 1908년까지 계속되었다. 그중 릴케가 보낸 열 통의 답장이 그가 장미 가시에 찔려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난 뒤에 책으로 출간되었다.
적성에 안 맞는 군사 훈련을 견디며 시를 쓰던 카푸스에게 릴케는 진정한 멘토로 보였다. 카푸스가 첫 답장을 받았던 1903년 봄날 오후를 상상해보자. 교정의 꽃들은 일제히 '빨강'이라고 외쳤을 것이다(릴케의 소설 주인공 말테의 표현이다). 이제 막 세상을 향해 자기 존재를 정직하게 드러내기로 결심한 카푸스에게 갈채를 보내기라도 하듯이.
첫 답장에서는 일종의 신원확인이 이루어졌다. 물론 카푸스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 혹은 누구의 아들인지를 확인한 것은 아니다. 릴케는 그가 정말 시인이 맞는지를 묻는다.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이 맞는 밤의 가장 고요한 시간에 '나는 쓰지 않으면 안 되는가'라고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 이 진지한 물음에 굳세고도 단순하게 '나는 쓰지 않을 수 없다'는 말로 대답할 수가 있다면, 그때는 당신의 생활을 이 필연성에 따라 구축하십시오." 카푸스는 자신의 시가 괜찮은지를 물었지만, 릴케는 물음의 순서를 바꿔 보는 게 어떻겠냐고 답한 것이다. 결과물이 어떤지는 쓸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단하는 일에는 부차적이다. 가령 좋은 가수가 되지 못할 바에는 가수가 되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것은 확실히 생존에 유리하다. 하지만 그것은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존재의 필연성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작가라는 곤경, 가수라는 곤경, 화가 혹은 배우라는 곤경. 필연성은 하나의 이름 아래 주어질 모든 곤경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만 생겨나는 위대한 속성이다.
릴케는 자신의 동료 예술가들이 필연성의 소유자라고 생각했다. 아내였던 조각가 클라라 베스트호프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1900년대에 건축과 조각은 남성의 예술로 여겨졌다. 여성들은 꽃이나 과일을 그리라는 식이었다. 여성은 남성이 다니는 국립대학에 갈 수 없었고, 수업료는 훨씬 비싸면서도 교육의 질은 많이 떨어지는 사설 미술학교의 수업으로 만족해야 했다. 게다가 조각가를 대상으로 매주 열리는 해부학 수업에도 여성은 참석할 수 없었다. "국가가 예술가를 위해 후원할 의무가 있다면, 왜 여성 예술가를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건가요?" 이런 분노 속에서 여성 조각가라는 힘겨운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인 베스트호프. 예술가 공동체 보르프스베데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릴케는 깊은 사랑과 연대감을 느꼈다. 군인이 되라는 부모의 강요를 꺾고 시인의 가난한 삶을 선택한 그가 아닌가.
카푸스가 닥쳐올 숱한 곤경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되기를 원하는지 확인한 후, 릴케는 조금 앞서 필연성에 묶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말한다. "당신이 보고, 체험하고, 사랑하고, 그리고 잃은 것을 마치 인류 최초의 사람처럼 표현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자신이 경험한 모든 일에 대해 자기만의 표현 방식을 발명하라는 말이다. 이런 당부에 카푸스는 풀죽은 채 중얼거렸을 것이다. "군사학교의 생활은 단조롭기 짝이 없어요. 사랑과 상실의 모험이 필요해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이 릴케는 편지에 덧붙인다. 창작을 위한 특별한 장소는 없다. 설령 세상의 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는 감옥에 갇혀 있다 해도 우리는 이미 무한한 양의 예술적 재료를 가지고 있다. 바로 우리의 어린 시절이다. 그것에 대해 써라! 이것은 작가가 되고 싶지만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습작생들에게 수많은 글쓰기 책에서 권유하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그 책들의 저자 대부분이 릴케의 이 편지 모음집을 가지고 다니며 꽤나 밑줄을 그었던 것이다.
우리가 경험한 일들은 평범해 보이지만 그것을 오래 음미한다면 상상도 못할 깊이를 드러낸다. 세계는 바다보다 더 깊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른다. 그러니 카푸스씨, 당신은 영혼의 광부가 되어야 해요. 특히 "우리가 포장한 채로 가지고 다니다가 열어보지도 않고 다음 사람에게 줘 버리는 이 두 가지의 과제", 즉 죽음과 사랑이라는 인생의 본질적 문제에 깊이 천착하기를. 이런 당부들도 인상적이지만 한 편지 말미에 적힌 릴케의 문장은 더욱 눈길을 끈다. "당신을 위로하려고 애쓰는 자가 때때로 당신을 기쁘게 하는 단순하고 조용한 말 그늘에서 아무런 고생도 없이 살고 있다고는 생각지 마시기를. 그의 삶도 많은 고생과 슬픔에 차 있고, 당신보다 훨씬 뒤져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그러한 말을 찾아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카푸스에게 의젓한 목소리로 조언을 주는 사람은 고작 스물여덟 살 청년이다. 이런 청년이 과연 멘토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카푸스보다 겨우 몇 해 더 산 애송이일 뿐인데? 그러나 조언자 또는 스승을 뜻하는 '멘토'에 지혜로운 남자 노인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은 고정관념일 것이다. '멘토'는 프랑스 작가 페늘롱의 '텔레마코스의 모험'이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유행한 말이라고 한다.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는 전쟁에서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찾아 모험을 떠난다. 그 여행길에 텔레마코스와 함께하며 조언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 멘토르이다. 멘토는 이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멘토르는 아테나 여신이 이 젊은이를 돕기 위해 아버지뻘의 남성으로 변신한 존재였다. 고대 그리스인의 통념에 맞춰 여신이 남성 코스프레를 하고서 등장한 것이다. 신화는 남성은 가르치고 여자와 아이들은 배워야 한다는 통념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것이 속임수임을 알려준다.
그렇지만 아테나는 왜 굳이 함께 여행하는 멘토르로 변장했을까? 성별 고정관념에 부합하려는 것이었다면 텔레마코스가 위기에 빠졌을 때 흰 수염을 기른 남성 신의 모습으로 반짝 출현해도 될 텐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멘토르가 텔레마코스와 함께 여행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멘토는 집에 앉아 모험을 떠나는 젊은이에게 경험담을 늘어놓는 존재가 아니다. 혹은 젊은이가 모험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왔을 때 그 모험은 이래서 저래서 잘못되었노라고 훈계하는 존재도 아니다. 멘토는 함께 여행하고 함께 모험한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절실한 지혜를 담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릴케 역시 젊은 시인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시의 길을 완주한 뒤 얻은 지혜의 엑기스를 전하는 게 아니다. 릴케는 카푸스처럼 시의 모험을 나선 중이다. 그래서 그가 시인에게는 늘 고독이 필요하며 이 고독을 아주 평범하고 값싼 결합과 교환하고 싶은 때가 있을지라도 견뎌야 한다고 썼을 때, 이 문장들은 카푸스를 향할 뿐만 아니라 릴케 자신을 향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나 이렇게 말할 때 그렇다. "당신 마음속의 해결되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해서 인내를 가져 주십시오. 그리고 물음 그 자체를 닫혀 있는 방처럼, 아주 낯선 말로 쓰인 책처럼 사랑해 주십시오." 아직 '말테의 수기'의 집필이 시작되기 전이고 '두이노의 비가' 같은 걸작의 구상과 집필은 단초조차 보이지 않던 1903년. 그 막막한 시절의 편지에서 릴케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인내를 가져야 한다고 썼다. 젊은 예술가들은 얼마나 많은 날을 인내해야 할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멘토는 멀리서 거룩한 지혜의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멀지 않은 거리에서 같은 곳을 탐험하는 동료 대원이다. 그러니 젊은 시인의 가장 좋은 멘토는 젊은 시인이 아니겠는가. "젊은이들에게 해주실 조언이 있다면?" 노작가 마거릿 애트우드는 에세이집 '타오르는 질문들'에서 이 질문을 싫어한다고 말한다. "집사가 고양이에게 하는 충고가 아무리 유용해도(저 아랫집 덩치 큰 수고양이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고양이는 듣지 않는다. 고양이는 자기 마음만을 따른다. 왜냐하면 고양이는 원래 그러니까.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젊은이들이 구체적으로 뭔가 듣기를 원할 때는 예외이다. 그렇지 않을 땐 아무리 유용한 조언을 해도 참견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위세와 구분하기가 어렵다. 그럼 지혜로운 노인은 뭘 하지? 충고나 조언이 아니라 축복을! 애트우드는 '햄릿'에 등장하는 폴로니어스의 대사를 빌려 모험을 막 시작하는 젊은이들에게 외친다. "잘 가거라. 내 축복이 네 안에서 피어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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