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범 속 사진을 봤더니, 선생님부터 학생까지 전부 다 뒷모습만 있더라고요."
서울에서 앨범 제작 업체를 운영하는 류모(59)씨는 올해 6월 한 초등학교 교사로부터 졸업 기념 앨범을 의뢰받고선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단다. 수십 장 사진 속 교사와 아이들 얼굴이 보이는 이미지가 아예 없었다고 한다. 담임 교사가 한 해를 기념하며 학생들에게 선물하는 앨범을 매년 숱하게 의뢰 받았지만, 이처럼 당사자 얼굴이 아예 드러나지 않는 형식은 올해가 처음이었다. 류씨는 "앨범은 얼굴이 의미가 있는데 왜 모자이크 처리한 것마냥 그랬을까 의문이 들어 의뢰자에게 전화했다"며 "그랬더니 일부러 그런 거라고, 학생들이 그렇게 하자고 했다더라"고 말했다.
딥페이크(인공지능을 통한 합성) 범죄의 가해자 다수가 10대로 확인되면서, 학교 현장의 사제 관계와 교우 관계를 지탱하던 신뢰에 빠르게 금이 가고 있다. 으레 찍던 졸업사진이 혹시나 범죄에 쓰일까 하는 우려가 커지면서, 졸업사진을 아예 찍지 않거나 찍더라도 얼굴을 남기지 않으려는 사례까지 나오고 있다.
18일 본보가 교사와 앨범 제작 업체를 취재한 결과, 졸업앨범 사진 촬영 시즌을 앞두고 다수 학교에서 졸업사진을 아예 싣지 않거나 얼굴이 확연히 드러나지 않도록 단체사진만 촬영하는 방식의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우리 학교는 교사들 사진은 빼기로 최근 결정했다"며 "대신 캐리커처(인물을 만화 캐릭터처럼 표현한 삽화)를 실어 기념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특히 교사들 사이에서 졸업사진 악용에 대한 우려가 크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지난달 30일부터 9일까지 전국 유치원과 초·중·고 교사 3,53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교사 10명 중 9명꼴로(93.1%) 졸업 앨범 사진이 딥페이크 등 범죄에 쓰일까 걱정한다고 답했다. 아예 앨범을 만들지 말자는 답변도 67.2%나 됐다. 경기 성남시의 한 앨범 제작 업체 대표는 "옛날에는 윗사람 지시로 억지로 찍었다면 요새는 교사 본인이 동의 안 하면 사진을 찍지도 못한다"며 "2, 3년 전부터는 교사 50명이 있다면 그중 10~20명은 안 찍겠다고 하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학부모 사이에서도 '내 아이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감이 확산하고 있다. 특히 서로가 아는 사람 사진을 올리면 누군가 그 사진을 합성해 주고 함께 조롱하는 '겹지방'(겹치는 지인방)이 유행처럼 번진 후에 더욱 예민한 문제가 됐다. 성남시 학부모들이 모인 한 온라인 커뮤니티엔 "졸업앨범 자체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반응까지 나왔다.
학교 현장의 우려처럼, 딥페이크 범죄 피의자 중 10대 비중은 상당하다. 경찰청이 올해 1월 1일부터 지난 14일까지 검거한 딥페이크 피의자 474명 가운데 10대는 381명(80.4%)에 달했다. 이 중엔 형사처벌이 어려운 촉법소년(10세 이상~14세 미만)도 71명이나 된다. 최근엔 동창생과 교사 등의 얼굴을 음란물에 합성해 2,000원에 판 고등학생이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졌고, 연예인 합성물을 텔레그램방에서 2만~4만 원을 받고 판 10대가 붙잡히기도 했다.
딥페이크로 교사와 학생 사이의 신뢰관계마저 무너지고 있다며 씁쓸해하는 이가 적잖다. 초등학교 4학년 담임교사 A(26)씨는 "최근에 반 아이들이 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을 찾았다길래 프로필 사진을 내렸다"면서 "사진이 어떻게 쓰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아찔해졌고, 매일 마주하는 아이들을 완전히 믿을 수 없다는 현실이 많이 안타깝다"고 털어놨다.
기술을 통제할 수 없다면, 딥페이크 성착취물의 폐해와 심각성을 제대로 교육하는 방법이 지금으로선 거의 유일한 해법이다. 딥페이크를 범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게 근본 문제인 만큼, 각 학교나 교사뿐 아니라 정부와 경찰이 적극적으로 교육 방법과 내용을 안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경기 지역 중학교 3학년 담임교사 김용준(29)씨는 "학생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는 것도 교육의 한 부분인데, 여러 문제 때문에 졸업앨범 촬영까지 피하게 되는 분위기가 아쉽다"며 "딥페이크가 무엇이고 얼마나 심각한 피해를 주는지, 학교와 사회가 힘을 합쳐 교육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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