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재미 삼아 세어보니 직함이 무려 15개였다고 한다. 문학평론가, 대학교수, 신문 칼럼니스트, 문화부 장관, 문명비평가, 에세이스트…. 그 앞에 서는 사람은 누구나 어느 호칭을 사용해 그를 불러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오롯이 글 쓰는 사람으로 규정할 뿐이다.
문학과 정치, 문화와 문명을 가로지르며 쉼 없이 창조의 질주를 계속해온 우리 시대의 지성 이어령(72). 그의 50년 문필활동을 정리한 전집 <이어령 라이브러리> (문학사상사)가 이 달 30권으로 완간됐다. 1956년 5월6일 한국일보에 평론 <우상의 파괴> 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 지 꼭 50년. 그 반세기 동안 이어령이라는 이름을 저자로 달고 나온 200여권의 책 중 대표 작품들을 골라 묶어낸 전집이다. 우상의> 이어령>
-선생님의 다산의 창조력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난 어릴 때부터 ‘한 우물을 파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았어요. 갈증이 나니까 우물을 파는 건데, 해갈이 되면 그만 파고 다른 데로 가야지 왜 계속 팝니까. 창조에 대한 갈증으로 50년간 이 우물 저 우물 파온 거고, 그 속타는 갈증이 날 여기까지 오게 한거죠. 그러다 보니 직함도 많아졌고.”
-그래도 타고난 성정이 아니면 책을 200권이나 쓰는 열정적 삶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중복된 것, 편저나 공저 등을 빼면 순수한 내 작품은 총 50권 정도인 것 같아요. 문단에 나온 지 50년이 됐으니 1년에 평균 한 권씩 쓴 셈인데, 글 쓰는 사람이 그 정도는 써야죠. 지금까지 <한국문학> 에 <나신과 의상> 을 연재하다 몸이 아파 그만두고 6개월 쉰 걸 빼면 글쓰기를 쉬어본 적이 없어요. 직업적으로 글 쓰는 게 몸에 배인거죠.” 나신과> 한국문학>
-선생님의 대표적인 이미지 중 하나가 ‘말의 천재’인데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두 가지가 있는데 수필가와 달변이에요. 수필을 폄하해서가 아니라, 엄연히 수필과 평론이 구분되고, 난 평론으로 문단에 나왔는데 장르를 바꿔버리니 싫은 겁니다. 달변이라는 말은 ‘내용은 없어도 청산유수’라는 말인데, 참 모욕적이에요. 강연 후에 누가 ‘청산유수시네요’하면 할 말이 없어요. 아무리 눌변이라도 말할 값어치가 있는 말을 해야지. 그래서 말의 천재라는 말이 참 싫어요. 내가 세상에 많이 알려진 만큼 손해 보는 부분인데, 그 말로 인해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몰라요.”
-‘달변의 수필가’라고 했다간 큰 일 나겠군요.
“큰 일 나지.(웃음) 대외활동이 많다 보니 선입견으로 나를 보는 사람들이 많아요. 내가 과대포장됐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참 안타깝죠. 학계에서는 내 ‘공간기호론’ 같은 것은 정말 독창적이라며 오히려 내가 과소평가됐다고 하는 사람도 많아요. 내가 달변가, 수필가로 안 알려졌더라면 평가 받았을 저작들인데….”
-선생님의 50년 글쓰기가 갖는 시대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내 50년 글쓰기에는 나 개인이 아니라 우리나라 지성사, 글쓰기의 역사와 담론이 담겨 있습니다. 채집문명에서 농업문명, 산업문명, 정보문명, 이 네 가지를, 즉 인류의 1만5,000년 역사를 한 몸에 축약해 치러냈으니까요. 외국 지성에 비해 내 수준이 떨어질지 모르나 4개 문명을 다뤘다는 점에서는 누구도 나를 따르지 못할 겁니다. 이건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한 인간이 50년간 글을 쓰면서 네 문명의 체험을 담아내는 건 체험의 밀도 면에서 아주 희귀한 거예요. 자화자찬이 아니라 70대 중반에 이른 내 동료들을 대변해 그 가치를 얘기하는 겁니다.”
-선생님께서 만드신 <문학사상> 이나 <이상문학상> 이 우리 문단의 중요한 제도로 자리매김했는데도 선생님에겐 문학 권력의 이미지가 없습니다. 이상문학상> 문학사상>
“나는 50년간 글쓰기를 해왔지만 내 패가 없어요. 이런 저런 문학파들이 많지만, 어디에도 ‘문학사상파’라는 것은 없죠. 정치, 경제, 사회 다 패를 이루어 하는 것이지만, 문학만은 외롭게 혼자 하는 것입니다. 문인은 구석기 사람이에요. 제 손으로 도끼를 만들어 저 혼자 토끼를 잡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건 문단이 아니라 ‘문당’(文黨)이죠.”
-아직 더 파야 할 우물이 있습니까.
“억울하게도 나는 소설을 써도 평론가가 여가로 쓴 소설이라고 폄하했어요. 사실 시를 쓰고 싶었는데, 왜 진짜 하고 싶은 건 아까워서 못 하잖수. 서정주의 <시론> 이라는 시에 ‘바다속에서 전복 따파는 제주해녀도/ 제일 좋은 건 님오시는 날 따다주려고/ 물 속 바위에 붙은 그대로 남견둔단다’는 게 있잖아요. 내게 시는 그 숨겨진 전복이에요. 50년 글쓰기의 대단원은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포에지(시가 가지는 정취), 시가 될 겁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집 한 권 내고 싶어요. 내가 제일 아끼는 거니까 자비 출판을 해서라도 장정부터 다 내 손으로 한 권 만들?싶습니다. 그 시집을 읽고 나면 이어령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이구나 알 수 있는, 그 50년을 단번에 설명해 줄 그런 시집 말입니다.” 시론>
-글 쓰는 사람으로서 선생님처럼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경우는 흔치 않은데요. 아직도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까.
“나는 한평생 오해를 받아왔어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나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나는 거만이 뭔지 몰라요. 끝없이 바닥에 있다고, 열등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죠. 그걸 언어로 위장하고, 때로는 폭로하고 한 겁니다. 너무 약하고 열등해서 언어라는 갑충의 껍데기를 가지려고 한 겁니다. 나를 찌르는 불행의 화살들로부터 나를 보호하려구요. 영화 <아마데우스> 를 보면 참 재밌는 게 나와요. 모차르트에겐 모든 창조하려는 자들이 가져야 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끝없는 존재의 열등감, 어린아이 같은 나이브함, 사회성이 없는 데서 오는 외로움. 이 세 가지가 없으면 글쓰기가 안돼요. 성경 <욥기> 에 보면 욥이 마지막에 하는 말이 ‘이 고통을 반석에 새길 수만 있다면’이잖아요. 이게 얼마나 감동적인지 몰라. 불행에 한 발짝 더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특권, 그게 글쓰기죠.” 욥기> 아마데우스>
-글쓰기의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습니까.
“정치, 이념이죠. 내게는 끝없는 딜레마였습니다. 정치에 말려들어 이념의 언어에 구속되면 창조적 글쓰기는 안 된다, 신분증 언어밖에 못 쓴다, 다짐하며 그걸 안 하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문학에서는 하지 말자, 1960년대에 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마치 구석기를 살고 있는 것처럼, 시공에 얽매이지 않은 문학을 하자 했죠. 대신 현실과 관계 맺는 정치ㆍ사회적 발언은 <흙 속에 저 바람> <축소 지향의 일본인> 같은 문화, 문명론으로 쓴 겁니다. 그런데 그게 오해를 받아 순수ㆍ참여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참 외로운 거죠. 정략적 눈길처럼 나를 상처주는 것은 없어요. 나는 고독한 창조자로 있고 싶었는데, 인위적으로 패거리 속에 나를 넣어서 보니까 그때처럼 외로운 게 없습디다.” 축소> 흙>
-글쓰기 50년을 돌이켜보면 어떤 소회가 드십니까.
“끝없는 오해와 자기모순의 50년이에요. 감사하는 건 내 이름의 프리미엄으로 모든 작품이 무대에 오르고 영화화했다는 겁니다. 외적 환경은 감사하지만, 콘텐츠를 놓고 보면 이해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외로운 50년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한, 내화외빈의 50년. 그게 내 50년의 아이러니죠. 글은 쓰는 순간 내다 버리는 쓰레기입니다. 이건 겸손이 아니에요. 내 글에 만족하면 또 쓰겠소. 전집 30권을 한데 묶어놓고 찍어놓은 사진을 보면 희열보다 멋쩍음을 느껴요. 숨기고 싶고 꼭 속옷 보여주는 것 같아 창피해요. ‘이게 전부냐? 네가 50년간 쏟아부은 게 이게 다냐’ 싶어 헛헛한 기분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습니까.
“전에는 하기 싫은 일은 절대 안 하고 남들 부탁도 매정하게 거절하고 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저 사람이 언제 또 나한테 부탁을 하랴 싶어 거절을 못해요. 그러다 보니 강연이다, 주례다, 인사말이다 스케줄이 너무 많아요. 초조한 게, 내 활동기간은 짧아지는데, 전복을 따야 하는데 잠수할 시간이 없어요. 막상 들어가면 숨이 차고.(웃음) 내년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런 저런 위원장, 고문 직함 다 정리하고 1년간 들어앉아 전복을 딸 겁니다. 시집 꼭 낼 겁니다. 또 대학에서 강연한 것들 묶고, 학술논문들도 정리해서 전집도 40권, 50권까지 이어가야죠. 글쓰기엔 정년도 고령화도 없으니까요.”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 이어령 "등단 글<우상의 파괴> 는 젊은 피울음" 우상의>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한 출판기념회에서 고성을 질러가며 당대 최고의 문인들을 비판한 어느 당돌한 청년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한 서울대 학생이 서정주, 김규동, 조연현, 백철 등을 두고 그게 시냐고, 문학이냐고 목소리를 높여 짓뭉갰다는 것이다.
소문을 들은 당시 한국일보 문화부장 한운사씨가 그 청년에게 그 이야기를 글로 써보라고 제안했다. 청년은 끓어오르는 비분강개를 “설마 신문에 실릴까”싶은 마음으로 썼고, 그것이 <우상의 파괴> 라는 제목으로 1956년 5월6일자 한국일보의 한 면에 전재됐다. 문학평론가 이어령의 등장이었다. 우상의>
“당시엔 추천이나 신춘문예가 아니면 제도 문학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죠. 하지만 나는 기성문단의 동의나 결재를 받고 싶지 않았어요. 내 힘으로 작가가 되겠다, 신춘문예나 추천, 투고 등을 통해 너희들로부터 승인받지 않겠다, 나는 너희들처럼 글 안 쓴다 하는 선언이었죠.”
그 글은 단지 문단의 우상들을 대상으로만 씌어진 글은 아니었다. “내가 유명해지려고 선배들을 짓뭉갰다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우상엔 이승만 대통령 등 젊은이들을 짓누르는 기성의 모든 억압이 포함돼 있었죠. 한 마디로 한국전쟁 이후 정신적으로 말살되는 젊음을, 한 번밖에 없는 내 젊음을 당신들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젊은 사람 살려’ 하는 절규였어요. 전쟁의 폐허 속에서 맨발로 쓴 젊은이의 피울음, 젊은이들의 첫소리였죠.”
그로부터 50년. 우상을 파괴하며 등장한 이 ‘앙팡 테리블’이 한국 지성사의 거목으로 우뚝 섰다. 그 거름이 된 50년의 글쓰기를 기념해 31일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이어령 교수의 글쓰기 50년> 이라는 주제로 특별강연회가 열린다. 이어령>
박선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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