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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前대통령 서거/ 반칙과 특권에 맞선 외로운 '도전과 승부사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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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前대통령 서거/ 반칙과 특권에 맞선 외로운 '도전과 승부사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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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5 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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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했던 삶

23일 서거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애는 파란만장한 도전과 승부의 역정이었다. 그는 스스로 정치와 인생을 승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그를 지켜보았을 고향의 봉화산에서 몸을 던진 충격적 선택은 그래서 그의 '마지막 승부'인지도 모른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생을 건 세상과의 마지막 사투를 통해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최소한의 명예와 가족, 그리고 정치적 신념과 가치를 지켜내려 한 것은 아닐까.

그의 도전과 승부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인권변호사와 민주투사로 변신하면서 시작됐다. 우리 사회의 고정관념과 금기에 저항하는 비주류의 길을 걷던 그가 깨끗한 정치와 지역주의 극복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아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꿈의 실현이었다.

하지만 '반칙과 특권없는 세상'을 향한 그의 열정은 재임 내내 기존 질서와 불화를 낳았다. 때로는 반대진영의 집요한 공격으로 만신창이가 되기도 했다. 그는 결국 "세상을 뜨겁게 바라보면서도 보는 눈은 한쪽이었다"는 냉정한 평가를 뒤로 하고 쓸쓸히 청와대를 떠나야 했다.

그러나 승부사인 그는 참여정부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았고 검찰 수사로 자신의 도덕성이 풍전등화인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그에 맞서려는 듯이 보였다. 그런데 힘이 부쳤던 것일까.그는 검찰에 소환되면서 "실망시켜 죄송합니다"며 국민 앞에 머리를 숙여야 했고 급기야는 유서에 밝힌 대로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는"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 그는 23일 새벽 봉화산에 올랐다.

■변호사로 인생 역전

노 전 대통령은 1946년 8월 6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봉하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인 아버지 노판석씨와 어머니 이순례씨 사이에서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6세 때 천자문을 다 외워 신동 소리를 듣고 초등학교 6년 내내 우등상을 받았다. 하지만 가난의 굴레는 무거웠다. 오로지 장학금을 받기 위해 들어간 부산상고 시절, 그는 방을 얻을 형편이 안 돼 교실 바닥에서 새우잠을 자기도 했다. 졸업 후 그는 농협 입사시험에 떨어져 어망을 만드는 한 중소기업에 취직했다. 월급이 너무 적어 한달 반만에 작파하고 시작한 사법고시 공부가 결국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봉하마을 산자락에 직접 만든 흙집이 그의 공부방이었고 아버지는 그곳에'마옥당'(磨鈺堂ㆍ옥을 가는 집)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는 시험에 잇따라 실패했고'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만 합격한 상태에서 군에 입대했다. 근무지는 강원 최전방 12사단. 소총수 복무를 마치고 제대한 그는 고시공부를 다시 시작했고 29세 때인 75년 4월 사법시험 17회에 늦깎이로 합격했다. 제대 후 고시 공부하던 시절, 그는 같은 마을에 살던 '권양숙'을 반려자로 맞았다.

■민주 투사 변신

노 전 대통령은 77년 대전지법 판사로 임용됐지만 7개월 만에 그만두고 78년 부산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 당시 그는 조세소송으로 이름이 알려지면서 잘 나가는 변호사로 통했다. 부산상고 동창회 회장을 맡고 동아대 동아리 학생들과 부산 광안리에서 요트를 즐긴 것이 이 무렵이다.

그러나 81년 민주화 세력에 대한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釜林)사건' 변론을 맡고 스스로 인생의 질적인 전환을 이뤄낸다. 그는 57일간 고문을 당한 한 학생의 시퍼런 멍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그는 훗날 "변호사인 나조차 믿지 못해 공포에 질린 눈으로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 모습을 보고 피가 거꾸로 솟는 듯 했다"고 술회했다.

이후 사회과학책을 탐독하기 시작했고, 학생 노동자 등이 연루된 각종 시국사건의 변호를 자임했다. 이때 형성된 '운동권 의식'은 우리 사회의 기득권 구조를 바꿔보려는 끊임없는 싸움의 모태가 된다. 87년 거제 대우조선 파업 때는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석규씨의 사체부검에 나섰다가 제3자 개입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기도 했다.

■청문회 스타로

민주투사로 이름을 알려가던 그는 88년 당시 김영삼(YS) 통일민주당 총재의 발탁으로 13대 총선에 나가 부산 동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처음 부산 남구를 제안받았으나 동구에 출마한 민정당 허삼수 후보와의 대결을 자청했다는 일화가 있다.

89년 12월 열린 5공 비리 청문회는 정치인생의 또 다른 변곡점을 만들었다. 그는 청문회에서 장세동 전 안기부장,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 등을 매섭게 몰아붙이며 단연 세간의 화제가 됐다. 특히 전두환 전 대통령이 증언대에 선 날, 여당의 엄호로 진실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 데 대한 항의표시로 의원명패를 바닥에 집어 던지?장면이 생방송으로 중계된 뒤 그는 일약'청문회 스타'가 된 자신을 발견했다.

이후 그는 계파 줄서기나 지역주의 편승을 거부한 채 과감히 현실에 도전하는 정치적 선택을 해 왔다. 90년 1월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YS, 김종필 총재가 3당 합당을 선언했을 때 그는 분노했다. 그는 자신을 발탁해준 YS를 "변절자"라고 비난하고 정치적으로 결별한 뒤 김대중(DJ) 총재가 이끌던 신민당과의 야권통합에 합류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95년 DJ가 통합 민주당을 깨고 대권 도전을 위해 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이번에는 DJ를 거부했다. "보스 중심의 줄서기는 전 근대적 정치행태의 답습"이라는 게 그의 외침이었다. 그러다 그는 97년 대선 직전에 국민회의에 합류, DJ의 대통령 당선을 도우며 다시 인연을 맺었다.

■노풍(盧風)의 승리

하지만 지역주의의 벽은 높았다. 호남을 기반으로 한 당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92년 14대 총선 때 고향 부산에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95년 부산시장 선거 때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후 그는 98년 당시 선거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던 이명박 의원의 사퇴로 실시된 서울 종로구 보궐선거에 출마해 다시 국회로 입성했다.

그러나 그는 서울 종로의 금배지를 버리고 2000년 16대 총선에서 다시 부산에 내려갔다. 결론은 낙선이었지만 그는 이 선거를 계기로 전국적 인물로 부상했다. 우직한 그에게 '바보 노무현'이란 애칭은 물론, 팬클럽 '노사모'까지 생겼다. 남들이 가길 꺼리는 길을 고집스럽게 걷는 무모한 듯한 그의 모습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한 것이다.

DJ정부 시절 노 전 대통령은 2001년 해양수산부 장관을 그만두면서 본격적으로 대권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변변한 조직도 없었지만 새천년민주당이 새로 도입한 '국민참여 경선'은 그에게 기적 같은 승리를 안겼다. 이인제 대세론을 뛰어넘은 것이다. 당시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이란 구호와 노사모의 열광적인 지원, 정치개혁의 상징물이었던 '희망돼지 저금통' 등은 거센 노풍(盧風)을 일으켰다. 경선 도중에 이인제 후보가 장인의 6ㆍ25 전쟁 당시 좌익 전력을 문제 삼자 그는 "대통령 되려고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라고 맞받아쳤다. 승부사적 기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대선 후보일 때도 우여곡절은 있었다. 지지도가 하락하자 당내에서 후보 흔들기가 시작됐다. 마침 월드컵 축구 4강 열기를 업고 급부상한 국민통합21의 정몽준 후보와의 후보 단일화 압력도 그를 압박했다.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받아들이는 승부수는 그를 대선후보로 만들었지만 선거 전날 정몽준 의원의 지지 철회로 위기를 맞기도 했다.

■대통령 재임, 실험과 충돌의 연속

대통령 재임 기간은 '도전'과 '충돌'의 연속이었다. 민주당이 구태라며 열린우리당을 만들고선 나중에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또 "반미면 어떠냐"면서도 이라크 파병을 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밀어붙였다.'좌파 신자유주의'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달라진 국제경제 질서 속에서 위치 설정에 혼돈을 겪었다. "왼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을 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지지층조차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 사회 전반에 걸친 그의 실험은 여권의 잇단 재보선 참패에 이은 2006년 지방선거 참패로 점차 동력을 잃어갔다. 2007년 김정일 위원장과 가진 평양에서의 10ㆍ4 남북정상회담은 마지막 안간힘이었다.

집권 초부터 그는 권력의 분점과 시스템에 의한 국정 운영을 강조했다. '평검사와의 대화'란 초유의 상황은 검찰 권력의 힘을 빼는 과정에서 그가 던진 도전장이었다. 돈 안드는 선거 등의 정치개혁은 그의 업적으로 꼽히고 있고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는 정경유착 관행을 사실상 뿌리 뽑았다. 이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 자신과 측근에게도 불똥이 튀었지만, 그는 "불법자금이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대통령직을 사퇴하고 정계를 은퇴하겠다"는 특유의 승부수로 위기를 돌파했다.

시대와의 불화는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소추 때 정점을 이뤘다. 국회는 2004년 총선 직전 "민주당 찍으면 한나라당 돕는다"는 노 전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지지발언을 문제삼아 그해 3월 12일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그러나 국회의 탄핵은 거센 역풍으로 작용,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18대 총선에서 과반의 압승을 거두는 기폭제가 됐다.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63일간의 대통령 직무 정지 끝에 탄핵소추안을 기각했다.

국회 과반 의석을 확보한 열린우리당은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과거사법, 언론법 등 이른바 4대개혁 입법을 밀어붙였다. 사회는 반으로 쪼개졌고 분열과 갈등이 고조됐다. 여기에 '버블세븐'이라는 신조어를 낳으며 부동산 가격이 폭등한 게 참여정부 지지율에 치명상을 입혔다.

■퇴임, 못다 부른 '고향의 꿈'

노 전 대통령은 2008년 2월25일 퇴임과 동시에 고향인 봉하마을로 돌아갔다. 그는 자서전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유년 시절의 내 기억에서 봉화산과 자왕골은 빼놓을 수 없는 무대다. 나는 그곳에서 칡도 캐고, 진달래도 따고, 바위를 타기도 했다. 풀 먹이러 소를 끌고 나오는 것도 항상 그 골짜기였다"고 고향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적이 있다. 그렇게 돌아간 고향에선 그를 보기 위한 관광객들이 넘쳐 났고, 그 자신도 유기농 오리농법으로 쌀농사를 짓는 등 비교적 평온한 시간을 지냈다. 퇴임 직전 혹독했던 참여정부 비판론도 그의 소탈한 인간적 면모가 다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무뎌져 갔다.

하지만 그의 오랜 후원자인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되면서 그는 칼날 위에 서게 된다. 이번 시련은 더욱 호됐다. 주류사회와 맞선 그에게 유일한 무기였던 청렴과 도덕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008년 12월 형 노건평씨가 세종증권 인수 비리에 연루돼 구속된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좌희정, 우광재'로 불렸던 측근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 이광재 민주당 의원은 물론이고, 서갑원 민주당 의원, 박정규 전 민정수석 등이 참여정부 핵심인사들이 줄줄이 검찰에 불려갔다. 또 권 여사와 아들 건호씨가 검찰 수사를 받았고, 급기야 그 자신도 지난달 30일 검찰의 '포토라인' 앞에 섰다. 역대 대통령으로는 세번째로 검찰에 소환되는 불명예였다.

그는 검찰 출두에 앞선 지난달 22일 "더 이상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 없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한다"고 했다. 스스로에게 내린 사실상의 정치적 사망선고였다. 그리고 한달여 뒤 어린 시절의 꿈을 키워가던 봉화산 바위 위에서 육신을 허공에 던지는 마지막 선택을 했다. 그 허공에서 그는 땅 위의 사람들에게"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는 말을 남겼다.

■ 故노무현 前대통령의 말과 글

▦"특정 후보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부정행위 아닙니까." (1960년 2월 김해 진영중 2년 때 3ㆍ15 부정선거 한 달 앞두고 '이승만 대통령'을 주제로 글짓기를 시키자 학우들을 부추겨 백지를 내도록 하고, 담임 교사가 질책하자)

▦"재판부는 이 사건의 역사적, 사회적 성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주기를 바란다." (1982년 8월2일 변호사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결심공판에서)

▦"살인마!"(89년 12월31일, 광주청문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광주학살을 '자위권 발동'이라고 강변하고 퇴장하자 출입문을 향해 명패를 내던지며)

▦"신당 창당은 반역사적 야바위 정치다." (9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할 당시)

▦"또 한번 어려운 길을 걷기로 결심했습니다." (2000년 4월 16대 총선에서 부산에 출마하면서)

▦"정부와 언론이 한 판 붙을 수 있는 것 아니냐." (2001년 1월7일 해수부 장관 시절 기자간담회에서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해)

▦"나보고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 (2002년 4월6일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연설에서 장인의 좌익활동 경력이 문제되자)

▦"미국에 안 갔다고 반미주의자냐. 반미주의자면 또 어떠냐."(2002년 9월11일 민주당 대선후보 당시 영남대 강연에서)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합니다.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는 청산돼야 합니다." (2003년 2월25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죠."(2003년 3월9일 전국 검사들과의 대화에서)

▦"대통령직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든다."(2003년 5월21일 광주 5ㆍ18 행사 추진위원회 간부 회동에서)

▦"우리가 쓴 불법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대통령직을 사퇴하고 정계를 은퇴하겠다."(2003년 12월14일 여야대표 회담 도중 대선자금 수사와 관련)

▦"좋은 학교 나오고 크게 성공한 분이 시골에 있는 별볼일 없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 하는 일이 이제 없으면 좋겠다"(2004년 3월11일 형 노건평씨에게 인사청탁을 한 혐의로 검찰조사 받던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을 거론하며)

▦"국가보안법은 독재시대의 낡은 유물이다. 낡은 유물은 폐기하고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는 게 좋지 않겠느냐."(2004년 9월 MBC 인터뷰에서)

▦"권력을 통째로 내놓는 방안도 검토하겠다."(2005년 8월25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며)

▦"대운하를 민자로 한다는데 제 정신가진 사람이 대운하에 투자하겠느냐."(2007년 6월7일 참여정부 평가포럼 연설에서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경선 후보를 비판하며)

▦ "'정치, 하지마라.' 요즘 사람들 만나면 자주 하는 말입니다. 얻을 수 있는 것에 비해 잃어야 하는 것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2009년 3월4일 홈페이지 '사람사는 세상'에서)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 (2009년 4월22일 정상문 전 청와대 비서관 구속 이후 홈페이지에서)

▦"국민 여러분께 면목이 없습니다. 실망시켜 드려서 죄송합니다." (2009년 4월30일 검찰 소환에 응하면서)

김영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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