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낙산, 가는 잎 옥잠이끼. 단기 4291년 8월23일 수집자 김만곤', '한라산. 그리마 이끼 4288년 8월 수집자 장후원'
22일 서울 종로구 동성중학교 과학실. 박철우(50) 생물 교사는 잘 짜인 나무함에서 이끼 표본이 담긴 작은 상자 12개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가로ㆍ세로 10~15cm 크기의 나무함으로 유리 덮개용 홈까지 파인 게 무척 정교했다.
상자 안에는 다양한 종류의 이끼가 한국전쟁 직후의 것으로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질 좋은 갱지로 만든 라벨과 함께 동봉돼 있었다. 라벨에는 채집 지역과 채집 연월일(단기로 표시), 수집자 등의 정보가 볼펜으로 꾹꾹 눌러 적혀 있었다. 박 교사는 "질 좋은 보관함과 상자 등 당시로서는 굉장한 고급 보관함에 소중하게 전해져 내려온 표본들"이라며 "갱지와 볼펜 글씨 등도 50여년 전 채집 당시의 것이 그대로 보전됐다"고 말했다.
동성중학교는 1954~57년에 수집된 이끼 표본 2,690점을 지난달 경기 포천시 국립수목원(광릉수목원)에 기증했다. 표본 종류로는 450여 종에 달한다. 2008년 현재 우리나라 전역의 선태식물 목록이 950종이니까 절반이 넘는 표본을 56년 전 중학생들이 발로 뛰며 수집한 셈이다.
이 표본들은 한국전쟁 직후인 동성중학교 과학반 학생들이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부터 3년 간 북한산, 광릉(경기), 속리산(충북), 한라산(제주) 등 우리나라 전역에서 수집한 것들이다. 당시 고병갑 생물교사와 학생들이 소풍이나 수학여행, 생물반 활동, 혹은 방학 채집 숙제 등을 통해 수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귀한 표본들이 소실될 뻔한 위기도 많았다. 과학실이 학교 사정에 따라 지하로, 혹은 옥탑교실로 수십 차례 이전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옮겨야 할 짐이 많은 과학실 이전 작업에서 부피만 차지했던 2,690개의 이끼들은 그야말로 '짐'에 불과했던 것.
하지만 '선배들이 어렵게 채집한 표본들을 후배들에게 전해주자'는 교사들과 학생들의 마음이 하나로 합쳐져 큰 손실 없이 표본들을 지켜왔다. 박 교사는 "이끼 보관 상자를 모두 합치면 과학실 장 하나를 꽉 채울 정도의 부피"라며 "생물학 석사까지 공부를 했지만 생소한 이끼류들이 많아 함부로 다룰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다 동성중 교장, 교사와 학생들은 표본들이 좀 더 넓은 세상에 나가는 게 훨씬 활용가치가 높을 것이라는 대국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표본들이 56년 만에 좁은 과학실에서 넓은 세상으로 나오게 됐다.
맹일은 동성중 교장은 "그 동안 많은 교사와 학생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그대로 사장됐을 소중한 과학 자료들"이라며 "수십년 전 학생들이 직접 발로 뛰어 모은 자료들이기에 더욱 가치 있는 학교 재산이었지만 표본의 가치를 더 발휘할 수 있도록 용단을 내렸다"고 말했다.
국립수목원 관계자는 "이끼는 우리 주변에 흔히 분포해 있지만 크기가 작고 찾아내기 어려워 연구 성과는 아직까지 고사리류나 꽃피는 식물에 비해 미비한 실정"이라며 "국립수목원에서 보유중인 선태 식물 표본과 기증 표본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선태 식물의 분포 현황 및 환경 변화에 따른 분포도 비교ㆍ분석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글ㆍ사진=강주형기자 cub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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