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란죄 누명에서 문학 구하기
인권침해 경험이 인생 바꿔
마지막까지 새로운 위협 경고
미국 연방대법원이 외설(Obscenity)을 일반적인 성 표현과 구분해 법적으로 처음 정의한 게 1957년 이른바 ‘로스(Roth)판결’이다. 음란물 배포 혐의로 기소된 출판업자 로스에 대한 재판에서 법원은 “동시대 지역 사회 평균인의 시각으로, 대상물(작품)의 일부가 아닌 전체를 살펴 지배적 주제가 단순한 호색적 흥미에 호소하고 있다면 음란물”이라며 “음란물은 ‘하등의 사회적 중요성’을 갖지 못하며 헌법의 보호 역시 받을 수 없다”고 규정했다.(이승선 저 표현 자유 확장의 판결에서)
이후 수많은 이들이 연방 음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다. 그 중에는 앨런 긴즈버그(1926~1997)의 기념비적 시집 울부짖음과 그 밖의 시들의 출판인 로렌스 퍼링게티(Lawrence Ferlinghetti)와 판매상인 ‘시티 라이츠 북스토어’ 매니저도 있었다.
긴즈버그가 장시 ‘Howl(울부짖음)’을 발표한 게 1955년이다. “불안하고 굶주린 벌거숭이들/ 몸을 끌고 분노를 폭발할 곳을 찾아 흑인가를 방황하며/(…)”그는 야성의 언어로 시대의 절망과 세대의 분노를 울부짖듯 토로했고, 무성한 성적 어휘와 표현들로 기성의 권위와 위선을 조롱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 세상은 거룩하다. 영혼은 거룩하다.(...) 혀와 자지와 손과 똥구멍도 거룩하다. 모든 것이 거룩하다. 사람도 거룩하다. 장소도 거룩하다.(...) 시는 거룩하다. 황홀경도 거룩하다.(…)”- 제프리 프리드먼의 2010년 영화 'Howl'에서.
그 해 10월 샌프란시스코의 한 갤러리에서 열린 낭독회에서 긴즈버그는 저 신작시를 격정적으로 낭독한다. 환호하는 관객들 틈에 퍼링게티가 있었고, 그는 즉석에서 출판을 제의했다고 한다.
‘Howl재판’은 57년 8월 16일 샌프란시스코 자치법정에서 배심원단 없이 재판장이 판결하는 벤치 재판(bench trial) 형식으로 열렸다. 담당 판사 클레이턴 혼(Clayton W. Horn)은 경범죄(절도) 피의자에게 그 해 개봉 영화‘십계’를 보고 감상문을 써서 법정에서 낭독하라고 판결한 이력이 있는 보수적인 기독교인이었다.
인권단체인 미국시민자유연맹(ACLU) 소속 변호사 알 벤디크는 로스쿨 졸업 2년차로 변호인단 세 사람 가운데 막내였다. 그들은 긴즈버그의 시가 ‘하등의 사회적 중요성’도 없지 않으므로 로스 판결의 ‘외설’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미 수정헌법 제1조(언론 표현 집회 결사의 자유)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 그들의 전략은 두 선임 변호사가 다양한 문학적 사례를 인용해 검찰의 논고를 논박하고, 벤디크는 문학 일반의 의미와 법 해석적 근거들로 변론을 지원하는 거였다. “(시인에게) 자신의 어휘 대신 김빠진 단어들로 완곡하게만 표현하라면 거기에 어떤 표현의 자유가 있겠는가? 작가는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바의 주제에 진실해야 하며, 그의 사상(thoughts)과 이념(ideas)을 그 자신의 언어(words)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벤디크의 최종변론 중에서. ‘First Amendment News’재인용)
10월 3일 선고일, 혼 판사는 다수의 예상을 깨고 무죄를 선고한다. 그리고 자치법관으로선 이례적으로 장문의 의견서를 낭독한다. “만일 작품 안에 아주 작은 사회적 중요성(the slightest redeeming social importance)이라도 있다면 음란물이 아니며, 마땅히 연방 수정헌법 1조와 14조, 그리고 캘리포니아 주법에 의해 보호받아야 한다.(…) 나는 우리 국민이 신학과 경제학, 정치학 그리고 모든 영역에서 진실과 허위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듯이 문학에서도 유해한 작품을 스스로 감별할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그는 4,000단어가 넘는 그 의견서를 맺으며 “음란물이라 주장되는 작품에 대해 고려할 때 우리는 이 말을 떠올려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며 영국 기사도정신의 상징적인 격언 하나를 인용한다. “Honi soit qui mal y pense.(Shamed be he who think ill of it.)”사악한 생각을 품는 이에게 수치가 있으리라는 저 말은, 나쁜 의도의 해석이 미치는 사회적 해악을 경계하자는 취지였다.
‘Howl 판결’ 이후 시가 외설 혐의로 기소된 예는 미국에서 단 한 건도 없었다. 워싱턴대 로스쿨의 로널드 콜린스 교수는 혼 판사의 의견서가 사실은 벤디크의 변론을 거의 그대로 인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농구에 비유하자면 나머지 두 변호사는 수비수를 유인해 ‘셋업(setup)’을 했고, 벤디크는 덩크슛을 넣었다.”(NYT, 2015.1.13)
알버트 모리스 벤디크(Albert Morris Bendich)가 1월 5일 별세했다. 향년 85세.
알 벤디크는 1929년 6월 18일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그의 20대는 미 하원이 비(非) 미국적ㆍ반역적 활동(가)들을 조사ㆍ배제하기 위해 설립한 비미활동위원회(HUAC)의 인권 침해가 극에 달하던 시대였다. 또 매카시즘의 시대였다. 1950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위스콘신주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1909~1957)가 “나는 297명의 공산주의자 명단을 갖고 있다”는 주장으로 포문을 연 매카시즘 10년 광풍에 정치인과 공무원 연예인 교육자 노동운동가 등 수많은 이들이 감시 당하고 조사 받고 직장을 잃고 투옥됐다.
벤디크는 캘리포니아 버클리대에서 경제학으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고, 55년 법학 학위를 딴 뒤 변호사가 된다. 그리고 곧장 ACLU의 상근변호사로 취직한다. 지난해 3월 벤디크는 ACLU 북캘리포니아지부 사무총장 압디 솔타니(Abdi Soltani)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대공황의 가난이 만연했던 30년대에 유년 시절을 보냈다. 다들 먹을 것을 찾아 쓰레기통을 뒤져야 했고, 돈 몇 푼 벌기 위해 무슨 일이든 일거리를 찾아 헤맸다. 그래서 나는 경제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대학시절 FBI요원이 강의실을 드나들며 교수와 학생을 사찰하는 등 헌법이 무시되고 인권이 유린당하는 현실을 경험하며 법학으로 전공을 바꿨다고 한다. “심지어 경찰들이 공중화장실 앞에 지키고 서서 불법 성인용품을 적발하기 위해 소지품을 뒤지던 시절이었다.”
50년대 ACLU 북캘리포니아 지부에는 34년 샌프란시스코 서부해안 해상파업을 유혈 진압한 주정부에 맞서 노동 인권운동을 전개한 어니 베지크(Ernie Besig, 1998년 작고)가 있었고, 41년 일본군의 진주만공습 직후 미국 군사지역 인근의 일본인(일본계 미국인 포함)들을 소개(疏開)하고 연금하라는 대통령령에 맞서 그들의 인권을 옹호한 웨인 콜린스(Wayne Collins)가 있었다. 콜린스는 미국 정부의 연금을 피해 피신했다가 체포된 일본계 미국인 프레드 코레마츠(Fred Korematsu) 소송에서 승소한 주인공. 교포 3세로 오클랜드에서 태어난 코레마츠(2005년 작고)는 일본계 차별을 모면하기 위해 이름을 바꾸고 눈꼬리 성형수술까지 받은 이였다. 코레마츠는 훗날 반 인종주의 인권운동가로 활동했으며, 2011년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그의 생일인 1월 30일을 ‘시민 자유와 헌법을 위한 프레드 코레마츠의 날’로 지정했다. 하지만 Howl재판에 투입될 당시 알 벤디크는 ACLU의 유일한 상근 변호사였다.
스탠딩 코미디언 레니 브루스(Lenny Bruce)가 법정에 선 것은 1962년이었다. 파격적인 풍자와 성 표현으로 큰 인기를 끌던 그는 61년 10월 샌프란시스코 노스 비치라는 나이트클럽에서 외설 공연을 한 혐의로 체포됐는데, 경찰이 특히 문제 삼은 단어는 ‘cock-sucking’이었다.
이듬해 3월 열린 재판의 판사석에는 57년의 바로 그 혼 판사가 앉았고, 변호인석에는 벤디크가 혼자 앉았다. 두 사람의 인연을 보건대 검찰이 재판부 기피신청이라도 했어야 할 만큼 피고에게 유리한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브루스가 배심원 재판을 요구한다. 레니 브루스의 재판(2002)이란 책을 쓴 콜린스는 “브루스는 (판사의 권위가 아닌) 시민(대중)의 심판에 대한 낭만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다”고 썼다.
벤디크는 외설적 코드가 코미디를 심화하는 데 얼마나 기여하는지 증언해줄 사회학자 등 다양한 증인들을 확보해야 했고, 검찰측 증언과 주장을 반박할 논리를 확보해야 했다. 거기에 더해 그는 ‘배심원 지침’이라는 걸 만들어 배심원단에게 숙지하도록 재판부를 설득했다. 지침에는 수정헌법의 정신과 1919년 웬델 홈즈 미 연방대법관의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원칙(Clear and Present Danger Rule)’ 즉 언론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때는 “직접 해악을 초래하는 현재의 위험이 있거나 그러한 해악을 유발할 의도로 행하는 경우”에 국한해야 한다는 원칙과 이후 법리 공방의 이해를 돕는 내용 등이 포함됐다. 보수적인 백인 배심원단이 법이 아니라 감정으로 유무죄를 판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배심원단은 5시간여의 숙의 끝에 무죄 입장을 밝힌다. 콜린스는 훗날 한 인터뷰에서 “만일 ‘지침’이 없었다면 유죄 판결이 났을 게 거의 확실하다”고 말했는데(NYT), 실제로 한 배심원은 재판이 끝난 뒤 “우리는 이 판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지침에 따르다 보니 무죄 외에 달리 판결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First Amendment News 42)
벤디크는 경제적 불평등과, 동성애 등 성적 지향에 차별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사형제 폐지에도 확고한 신념을 지닌 변호사였다. 1963년 ‘배니 페리시 소송’도 그의 변론사건이었다. 페리시는 사회보호대상자들의 집을 새벽에 급습해 실제로 독신인지(노동력 있는 남자와 동거하는 것은 아닌지) 강제로 조사하라는 사회보장국의 이른바 ‘침대 습격(Bed Raids)’지시를 거부, 해고됐다. 가택조사의 법적 근거도, 조사 지침도 없이 조사요원을 사회보장기금 수혜자의 집에 들이닥치는 것은 수정헌법 4조(사생활 침해 금지)의 위반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엇갈린 판결 끝에 벤디크는 1967년 승소했다.
60년대 말 ACLU를 나온 벤디크는 친구인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 사울 잰츠(Saul Zaentz, 2014년 작고)의 ‘사울잰츠컴퍼니’와 그 전신인 ‘판타지 레코드’에서 법률 자문겸 경영 파트너로 일했다. 그의 마지막 직함은 영화사 공동 경영인이었다. 사울잰츠컴퍼니는 오스카 작품상을 탄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75) ‘아마데우스’(1984) ‘잉글리시 페이션트’(1996)를 비롯, 최근 완성된 ‘호빗 3부작’을 만든 회사다.
미 수정헌법은 사실상 판례법으로, 시대와 상황에 따라 법 적용은 진퇴를 거듭해왔다. 미국 시민들은 벤디크처럼 진전된 판례로 수정헌법이 보장한 자유의 영역을 넓히는 데 기여한 이들을 ‘수정헌법 변호사’라 높여 부르곤 한다. 수정헌법 1조 변호사 가운데 한 사람인 로버트 콘리비어(Robert Corn-Revere)는 “알 벤디크는 희망과 용기로, 다수가 수용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던 표현의 자유를 확보하게 해줬다”며 “미국이 누리는 표현의 자유는 그에게 크게 빚졌다”고 말했다.
솔타니와의 인터뷰에서 벤디크는 자유를 위한 투쟁, 수정헌법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싸움은 지속돼야 한다며 테러 방지 및 예방을 명분으로 이뤄지고 있는 연방정부 정책들의 인권 침해 가능성을 우려했다.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이제 정부는 외설 단속을 위해 서점을 검열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기술도 변했다. 예컨대 국가안전국(NSA)은 스노든이 폭로한 행위들을 지금도 할 수 있다.(…) 국민인 우리가 선출한 정부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들이 우리의 종복인가, 아니면 우리가 그들의 종복인가.”
그는 국민이 끊임없이 헌법의 정신을 되새기고, 그 의미와 역사와 기원을, 우리 사회의 근본 원칙을 매섭게 따져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들에 맞섬으로써 자유의 개념을 확장해가는 일, 그것이 자유로운 시민이란 말이 의미하는 바를 보다 완벽하게 깨달아가는 과정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그리고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꼬집었다. “빈부에 따른 권력의 불평등이 자유 사회에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50년대 노동자의 노조 조직률은 30%에 달했지만 지금은 고작 6~7%에 불과하다. 그것이 미국 시민들의 표현의 자유, 교육과 이익을 대변할 자유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그 모든 것들이 자유의 신장과 관련된 문제들이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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