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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에 겨운 乙, 또다른 乙에게 '甲처럼' 앙갚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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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에 겨운 乙, 또다른 乙에게 '甲처럼' 앙갚음

입력
2015.03.20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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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노동자 접하는 고객 60%

"나라도 스트레스" 공감 뿐

학벌ㆍ스펙ㆍ외모 등 이유로

무시받는다는 지방대 학생도

"그래도 공립" 사립대 낮게 평가

서울시내의 한 면세점에서 근무하는 이소은(가명ㆍ27)씨는 올해 초 한 여성 고객에게 실수로 화장품을 판매했다 봉변을 당했다. 이씨는 뒤늦게 이 고객이 면세품 구매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것을 알아 채고 판매를 취소하려 했으나 “당신이 팔았으니 책임지라”는 폭언을 들었다. 밤잠을 설쳐가며 열흘 가까이 구매를 취소해달라고 사정했지만 고객의 남편은 오히려 이씨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누군 줄 아느냐. 경찰청 고위직에 있는 나에게 잘못하면 더 큰 걸 되돌려주겠다”고 협박했다. 부부는 남편이 근무하는 경찰서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도 4시간 넘게 나타나지 않는 등 이씨를 골탕 먹였다. 결국 이씨는 울며 겨자 먹기로 백화점에서 30만원 상당의 동일 화장품을 구매해 고객에게 ‘선물’할 수밖에 없었다. 이씨는 고객의 하대와 폭언으로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꼈다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모멸 겪고 약한 상대에게 분풀이

지난해 ‘감정노동을 생각하는 기업 및 소비문화 조성 전국협의회’가 소비자 1,000명과 감정노동자 69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고객 응대를 하는 노동자의 82.9%가 “고객으로부터 불쾌감(인격무시, 욕설, 폭력, 성희롱, 무리한 요구 등)을 겪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소비자들 역시 “내가 직원이라면 이런 불쾌감이 스트레스로 이어질 것”이라고 답했다는 점이다. 소비자의 60.2%는 자신이 고객 대면 노동자일 경우 고객의 무시(반말)로 가장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라고 응답했다. 피해자가 되는 감정노동자와 가해자인 소비자의 응답은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상대방이 불쾌감과 모멸감을 느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서비스업 종사자를 무시하는 문화가 만연해 있는 것이다. 특히 자신이 느낀 모멸감을 담아뒀다가 자기보다 약한 상대를 만나면 똑같이 모멸감을 주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놀이시설에서 티켓 판매 일을 하는 김은정(25)씨는 “아이 나이를 속이고 무료입장 하려다 적발된 손님에게 입장료를 내라고 하면 ‘이까짓 거 가지고 사람 피곤하게 한다’며 막말을 듣는 건 예사”라며 “손님들 기분을 맞춰주다 보면 스스로 비참해지는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퇴근 후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집 근처 네일관리숍을 찾는다는 김씨는 “평소에는 같은 서비스업 종사자로서 고충을 털어놓으며 마음을 나누기도 하지만, 기분이 안 좋은 날에는 갑질을 하면서 불만을 맘껏 쏟아내기도 한다”고 고백했다.

지잡대ㆍ편입충을 아시나요

한국 사회는 특히 학벌에 민감하다. 출신 학교로 그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지방의 4년제 공립대에 다니는 김영주(21)씨는 “집에서 가까운 대학을 선택했을 뿐인데, 서울 소재 대학에 다니는 친구들은 은근히 내가 다니는 학교를 무시해 종종 모멸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씨 역시 같은 지역에 있는 사립대 학생들을 깔보는 편이다. 그는 “이 지역에서는 우리 학교가 가장 성적이 높은 편”이라며 “봉사활동 모임에서 다른 학교 학생을 만나게 되면 수준이 떨어져 말이 안 통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젊은이들은 지방대학을 낮게 칭하는 ‘지잡대’, 여성을 비하하는 ‘김치녀’, 편입한 학생을 이르는 ‘편입충’ 등 인터넷 상에서 모멸감을 주는 단어들을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일상적으로 모멸감을 주는 사회

사회 전반적으로 모멸감을 주는 것은 일상이 되고 있다. 특별한 의도 없이 모멸감을 주고 받는 일이 늘면서 사회는 더욱 강퍅해지고 있다. 지난해 중앙대학교 학보사 ‘중대신문’이 재학생을 상대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79.4%의 학생이 “타인의 언행에 모욕ㆍ모멸감을 느낀 적이 있다”고 답했다. 모멸감을 느낀 이유에 대해서는 ‘상대방이 나를 무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라는 대답이 50%였고, ‘내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29.8%),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12.5%),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서’(7.7%) 등의 응답이 뒤를 이었다.

모멸감을 느낀 분야 역시 지극히 일상적이었다. 응답자의 42.3%(복수응답)가 ‘외모에 대한 발언’에서 특히 모멸감을 느낀다고 답했고, 스펙(35.6%), 경제적 능력(31.7%), 학벌(21.2%) 등 다양한 이유들이 나왔다. 모멸감을 느꼈을 때 어떤 생각을 하느냐는 질문에는 ‘내가 더 잘해서 찍소리 못하게 만들어야겠다’, ‘앞으로 무시하지 못하게 내가 더 나아져야겠다’는 의견이 많았다. 김원섭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자신이 우월한 입장이 되면 모멸감을 갚아주겠다는 자기중심적 사고의 발현이 우려된다”며 “가정, 직장, 사회에서 타인의 인격과 권익을 보호하는 제도적 문화적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양진하기자 real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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