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 명장들 회고록 힘입어 신화 탄생
소련에서 절멸전쟁 역할 분담
1995년 독일 절멸전쟁展 파문
공방 속 전쟁범죄 규명 공감대 형성
1945년 4월 말에 독일 최고 권력자 아돌프 히틀러가 지하 벙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국가수반이 된 카를 되니츠 독일해군 총사령관은 5월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독일 정규군과 독일 민족이 이 여섯 해 동안 인내하며 보여주었던 바는 역사와 세계를 통틀어 유일한 것입니다.” 무릎을 꿇었을지라도 군인답게 싸운 독일 장병은 떳떳하다는 선언이었다. 독일군과 싸운 미군 부대의 역정을 흥미진진하게 묘사한 미국 TV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도 투항 직후에 해산하는 한 독일부대 앞에 선 독일 장성이 “그대들은 조국을 위해 용감히, 그리고 떳떳이 싸웠노라”고 치하하는 장면이 나온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에는 패전했을지라도 독일 정규군, 곧 독일국방군(Wehrmacht)은 “결백하고 기사도적”이었다는 이미지가 퍼져 있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 하인츠 구데리안, 프란츠 할더 등 독일 명장들이 1950년대에 출간한 회고록은 대다수 독일 군인들을 나치 지도자들 및 이들에게 충성한 일부 고위 군사령관들과 애써 구분했다. 독일이 자행한 전쟁 범죄는 나치당 소속 무장친위대의 소행일 따름이며 정규군은 군인의 품위를 지키며 조국을 위해 싸웠다는 것이었다.
이런 책들에 힘입어 독일국방군은 나치 이데올로기에 물들지 않았고 전쟁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이미지가 점점 힘을 얻어갔다. 냉전 시대의 할리우드 영화에서 독일 장교는 멍청하게 나오거나, 아니면 속으로는 히틀러를 경멸하지만 다만 조국을 위해 싸우는 군인으로 묘사된다. 독일에서 만들어진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특전 U-보트’나 ‘스탈린그라드’에서도 독일 장병들은 나치즘에 무관심하거나 불만을 품고 있지만 군인으로서 임무를 묵묵히 수행한다. 독일 정규군 장병은 참으로 떳떳했을까.
독일군은 그리스를 제외한다면 유럽 대륙을 정복하는 과정에서는 눈에 띌 만한 전쟁 범죄를 많이 저지르지 않았다. 전투가 대개 독일군의 압도적 우세 속에 단기전으로 끝난 지라 그들에게는 승자의 아량을 베풀 여유가 있었다.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 장병은 ‘상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동부전선, 즉 유고슬라비아와 소비에트 연방에 진주한 독일군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잔학했다. 독일군은 끈질기게 저항하는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 부대를 진압하면서 현지 주민을 혹독하게 다루었다. 독일군 한 명이 목숨을 잃으면 주민 수십 명을 본보기로 처형하는 식이었다. 독일군의 전쟁범죄에 희생된 비전투원의 수는 소련 전선에서는 수십만, 수백만이라는 단위로 치솟는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히틀러와 나치 지도부는 유럽 동부전선에서 소련과 벌이는 전쟁을 ‘인종 전쟁’으로 여겼다. 그들에게 공산주의자는 곧 유대인이었고 소련 침략은 곧 “볼셰비즘에 맞서 서구 그리스도교 문명을 수호하는 성전”이었다. 동유럽의 유대인을 모조리 없애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독일 민족의 정착지로 만들어 노예로 삼을 슬라브인을 조금 남겨두고 나머지는 죽이거나 시베리아로 추방한다는 것이 그들의 전쟁 목적이었다. 유대인과 슬라브인을 박멸 대상으로 본 나치 독일은 소련에서 절멸전쟁을 수행했다. 아예 학살을 전담하는 특수부대인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이 무장친위대 산하에 편성돼 히틀러의 오른팔 하인리히 히믈러의 지휘 아래 바비야르 같은 무자비한 대규모 유대인 학살을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곳곳에서 저질렀다. 유대인과 슬라브인은 단지 무릎을 꿇려야 할 상대가 아니라 모조리 없애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독일의 정규군이 이 절멸전쟁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나이다. 전후에 서독 사람들은 ‘동부전선에서 소련 민간인에게 가해진 야만행위는 아인자츠그루펜의 소행이었으며 독일 정규군과는 관련이 없다’고 굳게 믿었다. 영미권의 군사사 전문가들은 독일군의 전략전술과 전쟁술에만 흥미를 품었지 전시 범죄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독일국방군은 결백했다는 신화가 태어나고 퍼지고 굳어졌다. 그러나 실상은 사뭇 다르다.
소련을 기습 공격한 뒤에 독일군의 발터 폰 라이헤나우 장군은 휘하 부대원에게 유대?볼셰비키 체제의 “힘의 원천을 완전히 파괴하고 유럽 문화권에 대한 아시아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이 전쟁의 목적이며 독일 군인은 “유대 열등인류에 대한 가혹하지만 정당한 조처”를 이해해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다. 독일국방군 사령관들이 나치의 인종 이데올로기에 동조했음이 드러난다. 이틀 사이에 유대인 3만3,771명이 학살된 그 악명높은 바비야르 사건의 무대인 키예프 지역에 진주한 부대가 바로 라이헤나우 장군 예하의 제6군 29군단이었다. 바비야르 사건에서 독일 정규군은 아인자츠그루펜의 작전에 체계적으로 힘을 보탰다.
독일국방군은 비슷한 류의 민간인 학살 작전의 때로는 수동적인, 그러나 때로는 능동적인 협조자였다. 동부전선에서 독일에 저항하는 파르티잔의 활동이 거세지자, 독일국방군은 유대인 학살 작전을 수행하는 특수부대와 수시로 연합 작전을 펼쳐 이른바 ‘파르티잔 토벌전’을 벌였다. 작전이 한 번 펼쳐질 때마다 민간인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에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문제는 그들이 거의 다 파르티잔과 아무 관련 없이 애꿎게 희생됐다는 점이다.
도시와 대규모 정주지의 유대인은 히믈러 예하 부대가 전담하고 시골의 유대인은 정규군 부대가 직접 처리하는 식의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곤 했다. 독일국방군은 파르티잔을 소탕한다며 시골 유대인을 한데 모은 뒤 사살하는 이른바 ‘시골 소탕’ 작전에 맛을 들였다. 이런 “파르티잔 없는 파르티잔 토벌전”에 희생된 민간인이 벨라루스에서만 5만명을 훌쩍 웃돈다. “독일군 한 명의 목숨에 대한 앙갚음으로 공산주의자 50~100명을 처형해야 마땅하다”는 히틀러 추종자 빌헤름 카이텔 육군원수의 지시가 독일군 하급 부대까지 전달되어 착착 이행된 결과였다.
항거하는 독일 군인이 없지는 않았다. 1942년 11월에 한 보병사단 지휘관이 예하 장병에게 “유대인과 집시도 파르티잔이거나 부역자로 드러날 때에만 사살 대상이 된다”, 또 “여자와 어린이의 사살은 군의 임무가 아니다”라는 지침을 내렸다. 그러나 이런 몇몇 개별 지휘관의 지침은 상부의 격분만 사서 더 무자비하게 민간인을 다루라는 나치당과 독일군 수뇌부의 명령을 초래했을 따름이다. 전쟁 동안 유대인 학살 지령에 군인답게 항거하는 움직임은 정규군 내부 그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게다가 소련 민간인에게 가혹 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중형을 받은 독일 군인도 전무했다. 소련 침공 직전인 1941년 5월 13일에 이미 앞으로 독일 장병이 소련 민간인을 상대로 저지를지 모를 범죄 행위를 사전에 사면한다는 명령이 독일군에 하달되었다. 이성과 윤리가 마비되기 쉬운 전쟁터에서 군인들의 잔학 행위는 군대 상급자가 막아보려고 무진 애를 써도 일어나기 일쑤인데, 그런 행위를 처벌하지 않겠다는 최고위 사령부의 지령은 군인 손에 살인면허장을 쥐어주는 꼴이었다. 그 결과는 독일군인의 총칼에 쓰러져 동부전선 곳곳에 널부러진 민간인의 숱한 주검이었다.
이렇듯 독일 정규군은 홀로코스트와 소련 민간인 학살의 방관자이면서 공모자였으며, 공범이면서 주범이었다. 양심적인 독일 역사학자들은 면밀한 조사와 엄정한 연구로 수많은 독일 정규군인이 인종 이데올로기를 믿었고 그로 말미암아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야만 행위를 저질렀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아내 ‘결백한 독일국방군’ 신화를 깨뜨렸다. 하지만 이러한 학술적 주장도 학계를 넘어 독일 정규군은 기사도적이었다는 독일 일반인의 굳은 믿음을 무너뜨리기에는 힘에 부쳤다.
이런 상황에서 1995년에 독일의 사회조사연구소가 전국을 돌며 열었던 ‘절멸전쟁: 1941년부터 1944년까지 독일국방군이 자행한 범죄’ 전시회는 독일 사회에 일대파란을 일으켰다. 나치 치하에서 군에 복무한 1,700만 독일인을 한꺼번에 범죄자로 몰지 말라는 반대와 ‘결백한 독일국방군’ 신화는 밑동부터 깨져야 한다는 찬성이 맞부딪치면서 격한 소용돌이가 일었다. 전시회를 둘러싸고 논란이 끊이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이제 독일군의 전쟁범죄를 덮어두기만 할 수는 없다는 공감대가 독일 사회에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달리 보면 이러한 논란 자체가 벌어졌다는 것 자체가 독일 사회의 건전성을 드러내준다. 건드리면 쓰라린 쟁점을 대책 없이 덮어두지 않고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사회가 건강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후 서독에서 창설된 독일연방군 산하의 군사사연구소가 “국가의 군대”였던 독일국방군과 “국민의 군대”를 지향하는 독일연방군의 연계성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를 놓고 스스로 문제제기를 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류한수 (상명대 교수, 유럽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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