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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머] '흙수저 빙고게임'을 아시나요

입력
2015.07.31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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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수저 빙고게임(사진)'이라는 게 SNS에서 돌았다. 각 칸에는 구체적인 ‘흙수저’로서의 조건이 쓰여 있다. 많이 해당할수록 빙고에, 그리고 가난에 가깝다. 흙수저란 무엇인가. 흙수저는 금수저의 대척점에 있다. 세상엔 부모 덕 보고 금수저 물고 태어나는 놈도 있고, 흙수저, 똥수저 물고 태어나는 놈도 있다. ‘누군 금수저 물고 태어난다’고 농담하는 그 금수저가 이 금수저 맞다. 금수저, 은수저를 지나 흙수저까지 촘촘한 스펙트럼이 있다. 그리고 금수저, 흙수저의 조건을 얘기하고 따져 보는 게, 요즘 떠도는 말놀이다.

흙수저임은 어떻게 알 수 있나. 빙고 판을 하나하나 체크하면서 살펴봤다. 재미로 만든 빙고겠지만 나름대로 기준이 있다. 첫째로, 숫자로 기록할 수 있는 재산이다. 가계부채나 월셋집인지 전셋집인지를 묻는다. 차는 몇 년 된 건지, TV는 몇 인치 짜리인지가 기준이 된다. 둘째론, 양적 지표가 아니라 생활 지표다. 소비 습관이나 집안 분위기를 따진다. 유행이 지난 옷을 꾸역꾸역 옷장에 쟁여둔다거나, 음식 남기지 말라고 잔소리를 듣는지 여부가 기준이다. 셋째론 부모님에 대한 기준이 있다. 부모가 너무 자식 교육에 집착하거나 본인들의 취미가 없다면 흙수저란다.

한 번 생각해보자. 취미를 가질 새도 없이 부모가 일을 하고, 아이 교육에 등골을 뽑아 쏟고, 집에 빚도 있고, 여름에 전기세 걱정하며 에어컨을 껐다 켰다 하는 집. 나는 이게 지극히 보통의 가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여기도 ‘흙수저’ 계급이라고 한다. 중산층과 하위층의 구분이 그렇게 크지도 않다는 느낌이다. 빚도 재산이라고 겉만 그럴싸한 집들이 쌔고 쌨고,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상태가 모두에게 기류처럼 흐른다.

능력 따라도 아니고, 학벌 따라도 아니고, 원래 집에 가진 게 있는 놈과 없는 놈으로 금, 은, 동, 흙의 계급을 나눈다. 개천에서 용 나는 일 없었던 계급 사회랑 비슷하다. 교육이나 개인 능력으로도 천장 뚫고 못 올라가는 사회. 그런 사회를 그려두고 사람들이 자조한다. 4년제 대학 가면 뭐가 좋냐 하면 그래도 영어는 좀 잘하게 된다고 대답한다고 한다. 올해 초 연세대 졸업식엔 이런 플래카드도 걸렸다. ‘연세대 나오면 뭐하냐, 백순데.’ 자조하는 처지가 다를 바 없다. 예전엔 위협받지 않던 영역까지 위협받는다. 청년들이 나이 들수록 더 각박해질 사회라서 이제 동수저인지 쇠수저인지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 같다. 금수저 빼곤 다 불안하다. 금수저만 에어백 있고, 다들 맨몸이다. 나는 청년들이 의심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금수저가 아니면 안 되는게 아닌가. 노력 따윈 상관없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 말이다.

영어권에서 'born with a silver spoon in one's mouth'라고 할 때 나오는 금수저 아니 금빛 나는 은수저. 게티이미지뱅크.
영어권에서 'born with a silver spoon in one's mouth'라고 할 때 나오는 금수저 아니 금빛 나는 은수저. 게티이미지뱅크.

● 모두가 노력하는 노력 과잉의 시대

‘쓸모’를 추구하고 살도록 설계된 길을 걸어왔는데, 결국 노력이 쓸모 없는 것인가 의심하게 된다면 어떨까. 어차피 금수저는 따로 있고, 나랑 경쟁할 흙수저들은 모두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노력하고 있다면? 모두가 노력하는 노력 과잉의 시대라서 내 노력이 별 쓸모도, 특별함도 보일 수 없다면?

2010년에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많은 사람이 입학선물로 자기계발서를 선물해줬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비롯해서 ‘마시멜로 이야기’, ‘시크릿’, ‘연금술사’도 있었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네 꿈을 이뤄준다거나 참고 견디면 성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책들이었다. 2000년대엔 이런 자기계발서가 한창 유행이었다. 자기 착취 담론이 잘 먹힐 때가 있었다. 그렇게 자기를 착취하며 우주의 손길을 기다렸고, 그렇게 2015년이 왔다. 그런데 내년엔 청년 고용 절벽이 다가온다고 한다. 취업 빙하기가 온단다. (관련기사 보기 ▶ 2016년~2020년, 청년고용 빙하기)

얼마 전 서점에 갔을 때는 2010년 이후 5년간의 변화가 눈에 보이는 듯 했다. 베스트셀러 목록엔 정신없이 노력해온 사람들에게 이제 그만하라고 말 거는 책들이 있었다. 테라피 컬러링북이 있었고, 마음을 들여다보라는 심리학과 인문학 책이 있었다. 지금 또 다시 2010년처럼 ‘노력 만능론’을 주창하면 사실 한 대 치고 싶을 것 같다. 절망도 힐링도 싫은 청년들이 택하는 게 조롱과 냉소가 아닐까 싶다.

일본에는 현실에 충실한 사람을 조롱하는 ‘리얼충 (リア充)’이란 말이 있다. 리얼충은 집에서 인터넷으로만 친구를 사귀고 생활하는 게 아니라 실제 현실세계에서 일도 있고 친구도 있고 애인도 있다. 듣기에 ‘그냥 보통 사람인데?’ 할 수도 있겠지만 다르다. 취업해서 일도 있고 연애해서 애인도 있고 돈 써가며 친구도 만나고, 밖에서 취미생활도 즐긴다. 리얼충의 SNS 게시물을 보고 꼴불견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는지 설문조사를 통해 물었는데 답변들이 재밌다. 매일 회식을 한다거나, 바쁘다거나, 자지 않고 일해야 한다는 걸 SNS에 쓰는 리얼충이 꼴불견이라고들 답했다. 이전 세대라면 ‘리얼충’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일본에서는 SNS에 연인들끼리의 데이트 사진을 찍어 올리는 사람들도 꼴불견이라는 설문조사도 나왔다. 사진출처=http://news.livedoor.com/article/detail/10391402/
일본에서는 SNS에 연인들끼리의 데이트 사진을 찍어 올리는 사람들도 꼴불견이라는 설문조사도 나왔다. 사진출처=http://news.livedoor.com/article/detail/10391402/

리얼충을 조롱하는 것에서 흙수저 빙고와 비슷한 재미를 느끼지 않을까 생각한다. 더 이상 열심히 살라는 ‘노력 만능론’에 속지 않고, 굴복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조건이 만들어진다. 진지한 절망을 할 필요가 없다. 힘들 수밖에 없는 현실을 농담으로 씹을 수 있다.

한국이 지옥 같다고 ‘헬 조선’이라고 비꼬는 청년 세대에게, ‘한국이 싫어서’ 이민 계를 든다는 청년 세대에게 기성세대는 무슨 말을 할까. 결국 더 노력해보라는 이야기를 하겠지 싶다. 짱돌을 드는 노력이든 토익 책을 드는 노력이든 뭐든 말이다. 그게 맞는 말일 수도 있다. ‘네네’하고 듣겠지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노력한다고 되겠냐?’

이런 답답함이 나쁜 방향으로 흐르면 결국 어디로 가는가. 타고난 금수저는 분노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로 ‘노력 없이’ 대우 받는 사람들이 오히려 조롱의 대상이 된다. 흙수저 보다 못한 똥수저가 멸시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 대상이 자신이 되면 우울함과 무기력함이 자신의 무릎을 꺾을 것이다.

칼럼니스트

썸머 '어슬렁, 청춘' ▶ 시리즈 모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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