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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만주국의 톱스타·야래향의 가수… "위안부에 사죄" 큰 울림 남기고 떠나다

입력
2015.09.0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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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연예인 출신 정치인 야마구치 요시코
일본의 연예인 출신 정치인 야마구치 요시코

1년 전 오늘(9월 7일) 일본의 연예인 출신 정치인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ㆍ94ㆍ사진)가 별세했다. 나이 든 이들은 그를 등려군과 주현미가 불러 귀에 익은 ‘야래향(夜來香)’의 가수로 기억한다. 공전의 히트작이라는 영화 ‘지나의 밤’과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추문’ 등으로 낯을 익힌 배우이기도 하다.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에도 여러 편 출연했다고 한다. 또 그는 1995년 일본 아시아여성기금의 대국민호소문에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교수 등과 더불어 16인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명부의 그는 전남편의 성을 딴 오타카 요시코 전 중의원의원이었다.

그의 삶은 드물게 뜨겁고 격렬했다. 1920년 남만주철도회사에 다니던 친중파 야마구치 후미오의 딸로 1920년 중국 랴오닝성 푸순에서 태어난 그는 소학교를 다니던 무렵 아버지의 친구였던 한 정ㆍ재계 유력자(리샤오슌 장군)의 수양딸이 됐고, 리샹란(李香蘭)이라는 중국 이름을 얻는다. 38년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이미 유명한 ‘중국인’가수 겸 영화배우였다. 일제는 여러 편의 관제 영화에 그를 출연시켜 만주 지배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데 활용했다. 전후 그는 ‘매국노’로 중국 공산당 군사재판에 넘겨졌으나, 어렵사리 일본 호적을 구해 처벌을 면하고 추방 당한다.

야마구치 요시코가 된 그는 50년 ‘황혼의 탈주’등을 통해 일본 배우로 명성을 이었고, ‘리샹란’으로서 홍콩 무대에도 섰다. 50년대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할 때 그의 이름은 셜리 야마구치였고, 그 무렵 미국서 활동하던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와 결혼했다(55년 이혼). 58년 외교관(3등 서기관)이던 오타카 히로시(2001년 사망)와 재혼하면서 연예계를 떠났다가 69년 방송에 복귀했고, 74년 자민당 후보로 참의원 선거에 출마해 3선했다. 자민당 여성국장을 맡기도 했다.

종군위안부 문제에 천착한 건 그 무렵이었다. 그는 자신의 젊은 날 시간과 공간을 공유했던 일제의 종군위안부들에게서 동류의식과 부채의식을 함께 느꼈을 것이다. 92년 정계를 은퇴한 72세의 그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부위원장을 맡았다. 95년 ‘기금’의 대국민호소문에는 “10대 소녀까지 포함한 많은 여성을 강제로 위안부로 만들고 군을 따르게 한 것은 여성의 근원적인 존엄을 짓밟는 잔혹한 행위였습니다.(…) 전 국민적인 보상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가 희생자와 국제사회, 그리고 우리의 차세대에게 져야 할 책임입니다”라고 밝혔다.

요시코가 숨지고 꼭 한 달 뒤인 2014년 10월, 아베 정권은 외무성 홈페이지에서 ‘대국민호소문’을 삭제했다. ‘강제’가 아니었다는 게 이유였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정권에, 특히 ‘강제’에 대해 할 말이 있었을 것이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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