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들, 여성 지위 향상에 위기
성차별 차원 넘어 극악 범죄로
공공연히 피의자 옹호 댓글까지
한국 사회가 페미사이드(Femicide)의 충격과 맞닥뜨렸다. 1976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제1차 여성대상범죄 국제재판에서 페미니스트 다이애나 러셀이 처음으로 공식화한 단어 페미사이드(여성ㆍFemale과 살해ㆍhomicide의 결합어). 2001년 이후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들이 여자를 살해한 것’으로 정의가 정립됐다. 서울 서초구 한 노래방 공용화장실에서 면식도 없는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살인사건은 최초의 페미사이드 사건은 아니지만, 페미사이드로 명명되는 첫 사건이 될 듯하다. 강남역 10번 출구를 추모공간으로 만든 분노와 슬픔은 ‘묻지마 살인’의 우연한 결과로 희석돼 온 그간의 페미사이드를 여성혐오 범죄로 분명하게 가시화하겠다는 젊은 여성들의 의지와 연대이기 때문이다.
극단 치닫는 여성혐오
이번 사건은 여성혐오의 반경이 게시판 댓글과 일상의 성차별 차원을 벗어나 극악한 여성살해에까지 이르렀다는 점에서 충격을 줬다. 기존의 여성살해가 실연이나 치정, 원한 같은 동기를 수반했다면, 이번 사건은 “평소 여자들이 나를 무시했다”는 동기에서 비롯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살해가 처음 사회적 이슈가 된 유영철 사건이 성매매 여성을 범행 대상으로 삼은 것과 달리 불특정 여성을 노렸다는 점에서 공포가 미치는 범위가 더 넓다.
여성학자 백수진씨는 ‘여성주의 관점에서 페미사이드 개념 구축하기’라는 글에서 “페미사이드는 단지 한 여성의 육체가 살해됨을 뜻하지 않는다”며 “이는 한 여성의 죽음임과 동시에 지금까지 자행된 수많은 여성들의 죽음이며, 모든 여성에게 가해지는 문화적 폭력의 종착점”이라고 말했다.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나서 강남역을 추모 공간으로 바꾼 이유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차별과 혐오에서 출발한 이 잔혹한 범죄에서 한국사회 내 여성의 소수자 지위를 읽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여성이라는 집단은 숫자가 많고 구성원의 성격이 이질적이기 때문에 소수자 정체성을 인정받기 쉽지 않다. 하지만 “피해자 집단인 여성들이 일반 혐오범죄와 동일하게 거의 일관된 공포, 분노 등의 반응을 보였다는 점은 여성이 생각보다 동질적 정체성을 가진 하나의 소수자 집단이며, 억압받고 범죄에 노출되며 차별 받는 소수자라는 걸 보여준다”는 것이다.
한국, 여성살해 많은 7개국 중 하나
페미사이드 하면 아랍의 명예살인 등을 떠올리기 쉽다. 한 사회의 성적 불평등 정도가 높을수록 여성살해가 증가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다. 하지만 불평등이 완화될 때 여성에 대한 범죄가 증가함을 보여주는 연구결과도 많다. 여성 지위의 향상으로 위협을 느낀 남성들이 권력 유지를 위해 폭력을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반격이론이다. 2000년대 이후 인터넷 공간을 중심으로 창궐한 된장녀, 김치녀, 꼴페미 등의 여성혐오 용어와 극우청년 사이트 일베의 번성이 그 사례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의 2013년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전 세계 202개국 가운데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이 살해되는 7개국에 포함된다. 통상 살인사건은 가해자 대부분이 남성이고, 피해자도 남성이 더 많다. 193개국의 남성 피해자 비율이 평균 78.7%였다. 반면 한국은 통가, 아이슬랜드, 일본, 뉴질랜드, 라트비아, 홍콩과 함께 여성 피해자 비율이 더 높았다.
만성화한 청년실업과 여성의 사회적 약진 등으로 좌절된 남성의 욕망을 여성 일반의 귀책사유로 돌리는 여성혐오의 기제는 앞으로도 자연스레 개선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 대한민국이 심각한 남초사회이기 때문이다. 통계청 추계에 따르면, 2015년 현재 결혼적령기에 해당하는 남성은 여성보다 약 45만6,000명이 더 많아 성비가 120대 100으로 극심한 불균형을 이룬다. 1980년대 본격화한 태아 성감별의 결과로 20% 가까운 남성이 배우자를 찾지 못하는 구조다. 2031년 최고치인 128.3까지 올라갈 것으로 추정된다. 가부장제적 사회문화까지 더해져 여성들의 결혼기피가 더욱 심각해지면 여성혐오는 더욱 악화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 사회는 이런 사회가 아니다” 말해야
가장 심각한 것은 지금 우리 사회가 공공연히 여성혐오를 발화해도 되는 사회, 비판을 받더라도 일부는 이런 주장에 공감할 것을 누구나 아는 사회라는 것이다. 강남역 살인사건의 피의자 김모(34)씨가 “여성이 무시해서 그랬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납득할 만한 사유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건이 알려진 직후 인터넷 공간에는 ‘여자가 그 시간에 술이나 먹고다니는 게 문제’라는 댓글이 이어졌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여성이 남성처럼 강해지려 하지도, 남성을 혐오하며 위축되지도 말라고 말한다. 홍성수 교수는 “이런 사건에는 움츠러들거나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전형적인 모습인데 초기 단계에서부터 서로 연대하고 힘을 모아가는 모습이 상당히 바람직하다”고 평가했다. 권김현영 교수는 “지금 필요한 건 ‘우리 사회는 그런 사회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평등하게 서로 존중하는 사회에 살 수 있다는 태도를 국가기관부터 언론까지 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여성들은 무서워하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우리는 가해자의 그런 언설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해요. 무섭지만, 무서워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고 계속해서 말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꺾이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어야 합니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박소영 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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