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이나미 칼럼] 차별 심리는 원시적 두려움이다

입력
2016.06.23 14:12
0 0

‘마이너리티’라는 말에서는 특이하고 창의적인 느낌을 읽지만 ‘소수자’ 혹은 ‘국외자’ 하면 뭔가 부정적인 이질감을 느낀다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소수’를 보는 영어권과 동양권의 차이일 수도 있다. 과거에는 유교적 전통 아래서 노동집약적 벼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다수를 따라 하는 동조성(Conformity)이 생존에 절대적 조건이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가지, 하는 표현은 이런 심리를 반영한다. 하지만 한 곳에 정주하는 농경사회에서 끊임없이 이동하는 노마드적 산업사회로 넘어가면서 이런 동조성은 오히려 생존과 발전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새로운 것을 찾아 도전하는 이들이 부와 권력과 명예를 쥐게 되는 반면에 아무 생각 없이 남들만 따라 하다 보면 이른바 ‘상투’를 잡아 결국 망하거나, ‘봉’이나 ‘호구’ 취급받는 소비자 역할만 평생 하다 말기도 한다. 생산 조건은 이렇게 변하고 있지만 심리는 그를 따라가지 못하기 마련이라, 새로운 것을 공부하지 못하는 이들은 여전히 남들과 같아야 한다는 강박적 동조성에 집착하면서 이른바 ‘다른 이’ 혹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앞장서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편견과 차별을 버리자는 목소리가 나오는 반면, 한쪽에서는 이민자, 동성애, 타 종교인, 정신장애자들 때문에 사회가 망가지니 강력한 제재나 물리적 격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전쟁과 혼란이 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주변으로 퍼지고 한편으로는 다양한 하위문화들이 서로 충돌하게 된 것이다.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전략은 물론 경제와 정치적 영역이지만, 심리적으로도 ‘다름’을 보는 태도와 행동을 분석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원래 인간은 낯선 이를 만나면 본능적으로 두려움과 긴장을 느낀다. 먼 원시시대, 낯선 집단과 만나 싸움 끝에 주인과 노예 관계가 형성되는 상황을 상상해 보면 된다. 타자를 없애거나 이기겠다는 것은 가장 원시적인 생존본능인 셈인데, 현대 인간의 무의식에도 여전히 원시성은 존재한다. 전학 온 학생, 타 지역 출신자, 이민자들을, 따돌리고 못살게 구는 이유다. 물론 ‘다름’에 대한 호기심도 보일 수 있다. 예컨대 지금까지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한 맛 난 음식을 누군가에게 대접받았을 때, 처음에는 망설이지만 일단 맛을 한 번 보고 나면 찬탄하면서 또 새로운 것은 없나 찾는다. 호기심을 가진 이들은 대체로 경직되어서 익숙한 것을 고집하는 이들에 비해 훨씬 정신적으로 젊고 자신감이 많은 편이다. 세 번째는 ‘낯선 것’과 싸우지는 않지만 폄하하고 아예 부정하는 이들도 있다. 여우의 신포도다. 새로운 것을 익히려면 익숙한 것들을 버리는 수고로움도 감수해야 한다. 사실 세포가 늙으면, 새로운 대상에 대한 학습과 적응력이 저하되기도 한다. 나그네들이 투명인간 취급당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쩌면 새 세계를 체험하면서 그동안 살아왔던 자신의 삶이 어리석고 보잘것없게 느껴질 수도 있으니, 아예 그런 가능성을 차단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다수가 아니라 ‘힘없는 소수’의 편에 서서 불이익을 당할까 두렵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면서 그 행동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도 그 꼴을 당할까 봐 이른바 ‘대세’를 따르는 이유다.

이민족, 난민, 장애인, 동성애자 등등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 범죄에 대한 소식이 들려 올 때마다 우리 안에 있는 원시적 심성, 두려움과 공포, 권력에 대한 집착 등 여러 가지 심리 역동을 보게 된다. 적지 않은 근본주의적 종교인들이 타 종교를 배척하지만, 성경이나 코란은 사랑과 포용과 화해의 메시지로 가득하다.

동성애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도, 소크라테스, 플라톤, 미셸 푸코 같은 철학자, 보들레르 랭보 같은 시인, 요한나 시귀르다르도티르 아이슬란드 전 총리,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 등 동성애자들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다. 의사들도 이제는 동성애를 더 이상 질병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정신장애를 비롯해 다양한 장애에 대한 차별도 그들을 병자, 혹은 이상한 ‘소수자’로 보는 시선 자체를 거두어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장애를 견디고 이겨 나가는 이들은 장애 없는 이들은 상상도 못 할 강한 정신력, 고통에 대한 성숙한 태도 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눈이 거의 안 보이는 친정 어머님은 지금도 깔끔하고 씩씩하게 살림하며 혼자 사시고, 온몸이 마비되어 마루에 온종일 누워 계시는 시어머님도 기저귀를 찬 채 먼 길 나들이를 갔다 오시면 즐거워하신다. 동성애자인 내 젊은 친구들은 누구보다 희생정신과 배려심이 많은데, 사회의 편견을 나름대로 삭히느라 많이 애를 쓰면서 아니든 나보다 때론 더 성숙해 보인다. 얼마 전에 만났던 전신 근무력증 학생은 웬만한 정치인 못지않은 혜안이 담긴 질문을 내게 던진 적이 있다. 그를 돌보는 어머니 역시 씩씩하고 유쾌하게 아들을 돌보고 있었다. 이른바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다수가 던지는 때론 부정적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정신력은 이른바 ‘주류’가 되어 참 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 나보다는 훨씬 더 강해 보인다.

이나미심리분석연구원 원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