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의 백범 연구가로 꼽히는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가 23일 백범일지 원본을 탈초ㆍ해제한 ‘정본 백범일지’(돌베개)를 내놨다. 그가 백범의 아들 김신(1922~2016)으로부터 1994년 백범일지 원본을 넘겨받은 지 20여 년만이다.
도 교수는 이번 책에서 백범과 김일성의 관계, 백범과 안중근 의사 가문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처음 공개했다. 백범이 김일성 빨치산 부대와 합작을 시도했다는 것과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을 백범쪽에서 처단했다는 일설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국한문 혼용체로 초서를 이용해 작은 노트에 급히 쓴 문장들이 많다 보니 한 글자 한 글자 정확하게 읽어내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남들에게 내보여도 아쉬울 게 하나 없는 ‘정본’을 남겨놓고 싶다는 일념으로 작업하다 보니 목 디스크가 와서 고생했다”는 도 교수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그는 현재 학술대회와 답사 일정 때문에 일본 도쿄에 머물고 있다.
-백범일지 하권의 ‘김일?’(金一?)의 마지막 글자를 택(擇)이나 정(靜)이 아니라 성(聲)으로 판독한 뒤 이를 북한의 김일성(金日成)이라고 했는데.
“흔히 백범과 김일성 하면, 단정수립을 막겠다며 결행한 1948년 남북연석회의만 생각한다. 그런데 백범일지에는 백범이 일제시대에 이미 만주지역 김일성의 활동에 주목한 대목이 있다. 당시 정세를 설명하면서 압록ㆍ두만 이북 지역에서 “왜병과 전쟁”하고 있는 김일성이란 인물에 대해 적어놓고 있다.”
-실제 접촉이 있었나.
“접촉 시도도 있었다. 백범 측근의 증언에 따르면 동북지방 김일성 빨치산 부대와 합작을 시도했다. 이충모라는 인물이 김일성을 만나기 위해 백범의 신임장을 가지고 중경에서 출발해 산서성까지 갔는데 해방이 이뤄져 성사되진 못했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는 그 영향 아래 있었던 셈인가.
“경우가 다르다. 1940년대 들어 일제의 패망을 예상하는 이들이 늘었다. 백범은 그럴 경우에 대비해 임시정부의 덩치를 키우려 했다. 김일성뿐 아니라 다른 좌파 계열인 김원봉, 김두봉 등에게도 편지를 보내 합작을 모색했다. 그에 반해 1948년 남북연석회의는 임정을 방어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고 봐야 한다. 임정의 집권이 물 건너간 상황에서 다른 방식으로 좌우통합을 모색한 셈이다. 연장선상이라기보다 옛 경험을 활용한 쪽이다.”
-해방 전 백범과 김일성 간 합작의 성사가능성이 실제 높았을까.
“가능성은 있다. 백범은 임정을 키우려 했고, 좌익계열 역시 우익과의 ‘통일전선’을 유지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물론, 좌우합작이 실제 성사됐다 해도 내부의 헤게모니 싸움이 어떻게 될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합작이 얼마나 오래 갔을지는 의문이지만.”
-백범과 안중근 집안간 얘기도 흥미롭다.
“알다시피 백범은 동학 활동 당시 안중근 아버지 안태훈에게 몸을 맡겼다. 백범은 안중근 집안의 가장 큰 수혜자였다. 백범이 의식 있는 민족주의자로 거듭나는 계기가 바로 안중근 집안과의 만남이었다. 백범 자신에 대한 혼담이 오가기도 했고, 나중에 실제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의 딸인 안미생은 백범의 맏며느리가 되기도 한다.”
-안공근 문제가 있다고 했는데, 안공근은 어떤 인물인가.
“안중근의 동생으로 처음엔 관계가 좋았다. 백범이 기획자라면, 안공근은 실행자라 보면된다. 1932년 윤봉길ㆍ이봉창 의거도 백범의 승인 아래, 일을 추진한 건 한인애국단 단장이었던 안공근이었다. 윤봉길ㆍ이봉창 의거 이후 중국 국민당이 임정을 항일투쟁 동지로 인정하면서 장개석과도 연결된다. 그런데 그게 1939년 안공근 실종이라는 안 좋은 결론으로 이어졌다.”
-안공근을 백범 측에서 처단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 일부 독립운동가 기록에서 보이는 대목인데, 백범일지를 보면 안공근 부분을 글자 위에 먹칠하는 방식 등으로 대폭 삭제해 놓았다. 그 중에 판독되는 글자를 보면 ‘분파적으로’ ‘안공근의 죄상을 선포하고’ ‘경비’ ‘분란’ 같은 단어들을 확인할 수 있다. 양측간 갈등이 심상치 않은 단계로까지 발전했음을 드러내준다.”
-왜 멀어진 건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 안공근이 돈과 조직을 관리하면서 이런저런 마찰이 있었던 것 같다. 스타일상의 문제도 있었다. 안중근이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라면 안공근은 무장에 가까운 스타일이던 모양이다. 직선적이고 저돌적이었다. 백범을 모시는 이들로서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또 당시 독립운동 진영을 평가한 중국 국민당 내부 문건을 보면 백범은 참 좋은데 변화한 시대를 따라가기엔 능력이 좀 부족하다거나, 김원봉은 참 똑똑한데 믿을 수가 없다는 등의 내용이 등장한다. 이때 안공근에 대해서는 추진력 있고 똑똑하고 믿을 만하다는 내용이 있다. 여러 측면에서 백범 쪽에서 보기에 안공근은 불편한 존재였던 것 같고, 그 갈등이 한꺼번에 폭발한 게 아닌가 싶다.”
-이후 양쪽은 완전히 갈라진 셈인가.
“백범의 맏며느리인 안미생은 해방 뒤 미국으로 건너가 돌아오지 않는 등 다 떠났다. 그나마 안공근의 장남 안우생이 백범 곁을 지키지만 그마저 월북한다. 안중근 집안과 완전히 갈라지게 되는데, 그 원인이 바로 안공근 실종사건 아닌가 한다.”
-안공근 관련 대목은 왜 지웠을까.
“1947년 발생한 장덕수 암살사건 때문이다. 암살 배후로 백범이 지목되자 그럴 이유가 없다는 일종의 증거물로 백범일지 필사본을 제출하는데, 안공근 부분이 괜한 오해를 살 수 있다고 여긴 것 같다.”
-안공근 얘기는 참 쉽지 않은 얘기다.
“아주 기나긴 얘기다. 딱 잘라 누가 옳고 그르고 말할 수 없는 문제다. 최근 중국측 자료가 발견됐다는 소식도 들었다. 안공근 관련 내용이 담긴 문화대혁명 때 자료라고 하던데 아쉽게도 비공개다. 언젠가 공개되면 이 또한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도 교수는 권희영(한국학중앙연구원) 등 이른바 뉴라이트 인사들이 2011년 ‘한국현대사학회’를 출범시킬 때 근현대사에 정통한 역사학자가 있다는 점을 내세우기 위해 그의 참여를 부각시킬 정도로 권위 있는 근현대사학자다. 당시 중국에 머물던 도 교수는 정확한 사정을 알지 못한 채 참여했다가 바로 현대사학회를 탈퇴했다.
때마침 ‘국부 이승만’ ‘건국절’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백범은 늘 그 안티테제로 불려 나온다. 도 교수의 생각은 어떨까. “정치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열린 시각’을 강조했다.
“정치가에게 중요한 두 가지 덕목을 꼽으라면 국민에 대한 헌신과 실제 성과를 이룰 수 있는 정치력일 겁니다. 우리의 비극은 그 헌신과 정치력이 백범과 이승만으로 갈라져서 나타났다는 점일 겁니다. 잘못된 것도, 틀린 것도, 못난 것도 아닙니다. 그냥 그러했다는 겁니다. 백범에 대한 증오는 물론, 신화에서도 벗어났으면 합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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