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항쟁
김상숙 지음
돌베개 발행ㆍ336쪽ㆍ1만7,000원
미군정 실정 따른 파업으로 발화
노동자 피살에 ‘10월 항쟁’ 확대
지역 민중ㆍ진보세력 힘으로 전개
민간인 1만5000명 희생됐지만
제주 4ㆍ3과 달리 조명 못 받아
저자, 탄탄한 사료 기반해 정리
“아직 안 온다. 67년 동안 기다렸는데…. 어데 가면 찾노?”
90대 할머니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다 연구자의 손을 잡고 운다. 할머니 남편은 ‘10월 항쟁’ 관련자란 이유로 1949년 청도에서 경찰에 학살당했다. 그녀는 당시 고인의 시신을 찾지 못했기에 아직도 남편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 이 항쟁으로 희생된 대구경북 지역 민간인은 총 1만5,000명으로 추정되지만 제주 4ㆍ3항쟁과 달리 학계에서조차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숙부 박상희(선산 인민위원회 간부)도 10월 항쟁의 여파로 경찰에 학살됐다.
2007~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대구 10월사건’을 조사했던 김상숙은 학살의 현장을 목격했던 이들의 목소리를 묶으며 이 사건을 ‘항쟁’으로 명명한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정해구의 ‘10월 인민항쟁연구’를 비롯해 1945~1953년 발간 신문, 국내 입수된 미군 문서 등 탄탄한 사료를 바탕으로 “1946년 10월 항쟁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기간의 대구 경북 일대의 사회운동과 학살의 역사를 가장 종합적으로 체계적으로 다룬 책”(김동춘 성공회대 NGO대학원장)이다.
1946년 10월 1일, 총파업과 시민대회 진압 도중 노동자 김용태가 경찰에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대구경찰서 앞에서 ‘시신 시위’가 벌어지고 삽시간에 노동자총파업이 시민항쟁으로 확대된다. 이튿날 미군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으로 진압된 이 사건은 ‘좌익 주도의 폭동’으로 치부돼 오랜 기간 ‘대구 10ㆍ1 사건’ ‘대구 10ㆍ1 파동’으로 불렸다. 이후 영천, 선산을 비롯해 12월 중순까지 남한 전역 73개 시군에 농촌 항쟁이 일어났는데 학계에서는 이 항쟁들을 대구 항쟁과 무관하게 ‘추수 봉기’(브루스 커밍스), ‘전민 항쟁’(정해구) 차원에서 연구했다.
저자는 대구 항쟁의 도화선을 1946년 9월 23일 부산 철도파업에서 찾는다. 전국 철도총파업에 대구 역시 가담했는데, 해방 직후 미군정이 친일 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을 강압적으로 시행한 데 대한 반발이었다. 이후 경북 등으로 뻗어간 농민 항쟁 역시 대구 항쟁의 범주로 넣는다.
“그때는 무슨 주의가 없었어요. 일하는 사람은 모두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사람들이라 남로당이 뭔지도 몰랐지. 선동자가 ‘양반 없애고 땅 준다, 이북처럼 논밭 부치던 것 네 것 된다’하고 선전하니 그 말에 어릴 때부터 고통 받고 대대로 맺혀 있던 한이 고마 풀렸는기라. 그래서 내 세상인가 싶어 천지도 모르고 폭동이 일어난 기라.”
대구 시위의 여파로 이어진 영천 항쟁을 목격한 함태원의 진술은 이 운동의 성격을 집약하고 있다. 당시 미군은 사건 배후에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중앙조직이 연루됐다고 비난했지만 저자는 여러 사료와 진술을 바탕으로 “전국적 지도부 없이 지역 민중과 지역 진보세력의 힘으로 전개된 항쟁”으로 결론 내린다. 항쟁의 좌절 원인으로 저자가 지도부와 조직 역량의 부족을 든 건 이 때문이다.
군경 토벌대는 운동을 이끈 빨치산뿐 아니라 민간인도 학살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과거 사회운동에 관여했다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이것이 반공 우익 국가인 한국 사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다. 서구와 정반대로 ‘국가→정치사회→시민사회’의 순서를 밟은 한국에서, 학살은 사회운동의 절멸을 의미했다. 국가 권력의 토대를 강화하는 폭력적 방법이었다.
“항쟁의 주역이자 가장 많이 희생된 세대에게 바치는 글”을 갈무리 하며 저자는 “이제 봉인된 시간 속 역사의 진실을 마주해야 할 때”라고 맺는다. 2016년 10월 1일, 항쟁 70주년을 맞는 날이다.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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