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종일관 정권 비선실세 최순실(60ㆍ구속기소)씨를 모른다고 발뺌하던 김기춘(77)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철옹성을 무너뜨린 한방은 한 네티즌의 결정적 제보였다. 김 전 실장은 위증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제시되자 12시간 만에 결국 말을 바꿨다.
김 전 실장은 7일 오전 10시부터 국회에서 열린 ‘최순실 국정농단 진상규명’ 국정조사특위 2차 청문회에서 최씨와의 관계를 묻는 의원들의 질문에 “전혀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한 술 더 떠 “알았다면 연락을 하거나 통화라도 한 번 하지 않았겠느냐”고 쏘아 붙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날 오후 10시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검증 청문회 동영상을 제시하자 내내 여유롭던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해당 영상에는 이주호 당시 한나라당 검증위원회 간사가 박근혜 후보의 최태민 관련 의혹 조사 결과를 설명하는 장면이 담겼는데, 최순실씨 이름이 수 차례 언급됐으며 박 후보 법률지원단장을 맡았던 김 전 실장이 지켜보고 있는 모습도 나왔다.
박 의원은 이를 증거로 “최순실을 몰랐다는 건 말이 안된다”고 강하게 질타했고 당황한 그는 “이제 보니 최순실이라는 이름은 제가 못 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나이가 들어서…”라며 말끝을 흐렸다. 최씨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음을 처음 시인한 셈이다.
●‘모르쇠’ 김기춘 전 실장이 당황하던 순간
박 의원 측에 영상을 제공한 인물은 온라인커뮤니티 ‘디씨인사이드 주식갤러리’ 이용자로 알려졌다. 이 네티즌은 이날 오후 9시쯤 유튜브에서 찾은 동영상 주소를 박 의원과 같은 당 손혜원 의원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통해 전달했다. 그는 박 의원과 나눈 카톡 대화 캡처 사진을 커뮤니티에 공개하기도 했다. 박 의원은 청문회가 끝난 뒤 트위터에 “시민의 힘으로 최순실을 모른다던 김기춘 증인의 실토를 들을 수 있었다”고 밝혔고, 손 의원도 페이스북에 “1분이라도 빨리 발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앞선 질의 순서였던 박 의원에게 양보했다. 좋은 결과로 이어져 좋았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네티즌은 이미 최순실 게이트 국면에서 의혹 당사자들의 과거 행적을 파헤치면서 ‘민간 수사대’의 위력을 보여줬다. 지난 10월에는 최씨 딸 정유라씨가 과거 “능력이 없으면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라는 글을 올린 사실을 공개했고, 최근에는 10년 전 EBS 인기프로그램에 승마 유망주로 나온 정씨 모습도 네티즌의 힘으로 밝혀졌다. 김귀옥 한성대 사회학과 교수는 “정치권과 검찰의 무능에 지친 시민들이 다각도 압박을 시작했다”며 “스스로 문제를 추적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네티즌 수사대도 시민혁명을 만들어가는 주체”라고 말했다.
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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