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김복동 할머니는 위안부 문제를 알리기 위한 미국 방문 일정 중이던 2015년 7월 시카고의 한팔레스타인계 미국인 활동가를 만나 전시성폭력 피해 여성을 지원하는 나비기금을 전달했다. 기금을 받은 여성은 이스라엘군의 성폭력 및 고문 생존자인 라스미아 유세프 오데(70). 1994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 팔레스타인 평화운동과 미국 내 아랍 여성을 위한 정의 운동에 헌신한 오데는 2004년 미국 시민권을 얻었으나 현재 추방의 위기에 내몰렸다. 미 당국은 시민권 심사 당시 이스라엘에서 복역사실을 밝히지 않았단 이유로 7년의 징역 및 추방을 구형, 2015년 3월 디트로이트 연방법원에서 18개월의 징역을 선고 받았다. 하지만 당국의 행보는 ‘반(反)테러법’에서 최근 중동 6개국 출신 주민의 입국 금지로 이어지는 반아랍 움직임의 연장선이라는 지적이 거세지고 있다.
오데의 인생 여정은 팔레스타인인의 뿌리 뽑힌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오데는 1947년 예루살렘 인근 소도시 리프타에서 태어났다. 이곳 주민들은 모두 이듬해 이스라엘 건국 전후로 벌어진 전쟁 중 유대인 민병대에 추방당했다. 오데의 가족은 서안지구 라말라로 피난했지만 1967년 서안지구를 비롯한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군사점령 당했다.
1969년 2월 한밤중에 오데의 집에 들이닥친이스라엘군은 당시 대학생이던 오데와 자매 2명, 아버지를 체포하고 며칠 뒤 집을 폭파시켰다. 이 과정에서 오데 언니는 사망했다. 오데의 혐의는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인민전선(PFLP) 조직원으로 예루살렘 대형 슈퍼마켓 테러 및 영국 영사관 테러 미수에 가담했다는 것. 45일간 이뤄진 심문 내내 구타와 성폭행 등 고문을 당했지만 오데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하지만 심문관이 아버지를 끌고 와 딸을 강간하라 명령하자 오데도 한순간 무너져 내렸다. 거부하던 아버지는 심문관의 구타 끝에 기절했고 아버지가 고문으로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 결국 오데는 조작된 자백서에 서명했다. 한 달 후 재판에서 자백 내용을 부인했지만 군사법정은 종신형을 선고했다.
10년 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첫 수감자 교환을 통해 75명의 팔레스타인 정치범과 함께 석방된 오데는 같은 해 유엔에 출석해 자신이 ‘테러범’으로 조작되기까지 당한 일련의 과정을 증언했다. 이후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유엔 구호를 받을 수 있게끔 지원 활동을 이어갔으나 1994년 암투병 중인 아버지의 간호를 위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10년만에 시민권을 얻었지만 다시 법정 위에 섰다.
오데는 고문 당시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무죄를 호소하지만 구제 절차가 없다. 자백서의 진실 여부를 다투려면 고문부터 다뤄야 하는데, 당사자들의 증언 외엔 어떤 증거도 없다. 반세기 전 일이라서 만은 아니다. 최근 사건도 증거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에서 고문은 아직도 범죄가 아니고, 심문과정에서 정보기관과 경찰의 녹화 의무가 면제돼 고문 증거를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스라엘 인권단체 고문방지공공위원회(PCATI)에 따르면 지난 10여년간 이스라엘 정보기관 신베트가 자행한 고문에 대해서만 1,000건 이상의 고발이 이뤄졌지만 한건도 기소까지 되지 않았다.
오데는 억울한 복역 후 다시 20년 넘게 살아온 미국에서 추방당할 위기에 처했다. 시민권 신청 전까지 오데는 이스라엘에 의해 고문ㆍ수감 당한 일을 미국 땅에서 공공연히 밝혀왔기에 그의 추방은 비단 출입국 관리 문제만도 아니다. 오데가 석방된 1979년 첫 수감자 교환은 역사적 사건이고, 당시 주이스라엘 미 대사관은 물론 미 국무부도 알고 있던 일이다.
미국 법원의 첫 선고 후 항소법원에서 이어진 법정공방 끝에 23일(현지시간) 오데는 징역 없는 추방을 제안하는 당국의 사법거래를 받아들였다. 오데의 변호를 맡고 있는 ‘라스미아 변호 위원회’는 “현재의 인종차별적 정치 기후에서 공정한 재판을 더 이상 기대하긴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또다시 뿌리 뽑힌 오데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뎡야핑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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