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적십자회담 제의에도 무반응
도발 수위 높이며 통미봉남 전략
키신저는 주한미군 철수 등
中과 직거래론까지 주장
트럼프, 한국 따돌리기 관측도
시진핑, 사드 배치에 서운함
한중 정상회담 열기도 힘들어져
군사당국회담에 이어 이산가족 상봉 논의를 위한 적십자회담 제의에도 북한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정부가 적십자회담일로 제안한 1일까지 북한이 반응을 보이지 않음에 따라 “운전석에 앉아 대화를 통한 한반도 문제 해결을 주도해 나가겠다”던 문재인 정부는 겸연쩍게 돼 버렸다. 반면 북한은 미국을 상대로 협상력을 키우기 위한 차원의 도발 수위만 높이고 있다. 이른바 북한의 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이다.
북한뿐 아니라 주변 당사국 모두가 문재인 정부를 소외시키고 있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발 이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즉각 전화통화를 하고 대북 공조 강화를 다짐했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낄 틈은 없었다. 문 대통령은 미국 측과의 공감대를 넓히기 위해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의 추가 배치를 서두르고 있지만 중국으로부터는 반발만 사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한반도 문제에서 우리 정부만 소외 당하는 이런 상황을 ‘코리아 패싱’으로 표현했다. 바른정당 최고위원인 김영우 국회 국방위원장은 1일 원내대책회의에서 “북한의 ICBM급 미사일 발사와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52분간 전화통화를 했지만 문 대통령과는 통화하지 않았다”며 “긴박한 안보 상황에 미국ㆍ일본 정상과 통화 한 통 못했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또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 한반도 문제를 중국과 협의하고 주한미군 철수도 논의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 논의 테이블에도 한국은 보이지 않는다”며 “대북 압박과 제재가 필요한데 대화를 우선하는 대북 정책을 국제사회가 믿어줄 리 없다”고도 했다.
실제 서울이나 워싱턴 정가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문 대통령을 따돌리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적지 않다. 한미 정상끼리의 통화는 휴가 중인 문 대통령의 복귀 시점인 5일쯤에나 가능하리라는 게 청와대 설명인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이 대북 대화를 강조하는 문 대통령과의 제재 협의를 미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북한과 거래하는 제3국 기업ㆍ개인까지 제재하는 세컨더리 보이콧 등 대중 압박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중국의 대북 압박을 견인할 수 있는 파격적인 카드가 미국에 필요하다는 제언도 나온다. 미중간 직거래론이다. 최근 미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미 외교가의 거물인 키신저 전 장관이 북의 ICBM 도발 직후 미 행정부 핵심 관료들에게 북 정권 붕괴 이후 상황에 대해 미중이 미리 합의해둘 것을 제안했다. 완충 지대(북한) 상실을 걱정하는 중국에 주한미군 철수라는 선물을 주는 방안까지 검토하라는 조언인데 이때 한국 이익은 도외시될 수밖에 없다.
중국은 중국대로 우리 정부를 외면하고 있다. 문 대통령이 사드 추가 배치를 지시하자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은 문 대통령에게 속았다며 서운함을 토로할 정도라고 한다. 이 때문에 한일 정상회담 전에 한중 정상회담을 갖겠다는 문 정부 계획도 헝클어진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미국과 직접 대화를 하는 순간 우리의 주도권은 상실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전직 청와대 외교안보 수석은 “미국이 우리 뜻과 상관없이 사실상 한반도 비핵화를 포기한 채 핵ㆍ미사일 동결 수준에서 중국ㆍ북한과 합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런 기류 속에 이달 초 필리핀에서 열리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계기 남북 외교장관 회담도 사실상 물 건너간 것으로 알려지면서 북미 접촉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정상간 전화 통화가 좀 늦게 이뤄졌다고 코리아 패싱이라 할 수는 없다. 대화 제의에 대한 북한의 반응을 기다려 볼 필요가 있다”며 과도한 우려를 경계했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조영빈 기자 peoplepeopl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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