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서울 구로구 여인숙에서 중국동포 A(당시 67)씨가 좁은 화장실 바닥에 베개를 베고 피투성이가 된 채 발견됐다. 양쪽 팔꿈치 안쪽 동맥은 베어졌고, 샤워기 아래 커터칼이 있었다. 타살 흔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살인을 배제할 수도 없었다.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계 소속 혈흔형태 분석 전문수사관들은 현장을 분석, A씨가 쓰러진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다. 선 채로 벽에 오른팔을 대고 자해를 시도하다 그는 잠시 주저하며 지혈을 시도했고, 이내 다시 왼팔까지 그었다. 이후 고통에 몸부림치다 숨졌다. 살인이 아닌 자살이라는 것이다.
약 147㎝ 높이에서 처음 분출해 좌변기 쪽 벽면에 묻은 혈흔은 그가 오른팔을 먼저 칼로 그었음을 보여줬다. 손으로 쥔 위치를 제외하고 피가 흥건히 묻은 수건은 그가 지혈을 시도했음을, 약 50㎝ 높이에서 출혈이 시작돼 출입문 왼쪽 벽면에 묻은 출혈 흔적은 그가 쓰러져 가며 2차 자해를 시도했음을 말하고 있었다. 좌변기 아래와 바닥에 묻은 혈흔은 그가 죽기 전까지 고통스러워했다는 증거였다.
이처럼 혈흔형태 분석은 ‘외력이 혈액에 작용하면 예측 가능한 결과를 낳는다’는 간단한 원리를 따른다. 현장에 남은 여러 종류 혈흔을 종합하면 어떤 범행 도구가 사용됐는지, 어떤 방향으로 행위가 이뤄졌는지, 출혈 이후 피해자가 어떤 동작을 했는지 등을 추론할 수 있다는 게 혈흔형태 분석 전문가들 설명이다. 피의자가 혐의를 부인하거나 형량을 낮추려 해도 혈흔을 토대로 객관적 상황을 제시하는 게 가능해졌단 얘기다. 1997년 4월 햄버거가게 화장실에서 대학생 조중필(당시 23)씨가 살해당한 채 발견된, 일명 이태원 살인 사건 역시 혈흔 분석을 증거로 19년 만에 진범(아더 존 패터슨ㆍ38)을 잡아냈다.
사건 현장에 흩뿌려진 혈흔을 어떻게 분석하는가는 대략 다음 8단계를 따른다.
(1) 개별 혈흔을 분석하기 앞서 전체 현장에 익숙해져야 한다. 숲을 보지 못하면 중요한 나무가 무엇인지를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2) 많은 혈흔들 중에서 각각 혈흔을 개별 혈흔으로 인식하고
(3) 각 혈흔을 분류법에 따라 그룹화 한다. 2개 상위범주(비산혈흔과 비(非)비산혈흔)와 4개 하위범주(선형비산혈흔, 비(非)선형비산혈흔, 매끄러운 경계, 불규칙적 경계)를 만드는 식이다.
(4) 혈흔 형태 방향성과 움직임
(5) 혈액 충돌각도 등을 파악한다
(6) 혈흔 간 관계와 혈흔과 다른 증거와의 관계를 분석한다. 즉 현장을 다시 전체적으로 바라본단 얘기다. 6단계까지 분석에서 얻은 정보를 모두 활용하면 서서히 그림이 그려진다.
(7) 설명 가능한 피해자의 행위를 찾는다. 혈흔 형태와 연관된 다양한 가설과 이론을 만들고, 이를 검증해 혈흔이 실제로 그렇게 생성될 수 있는지 입증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추가로 부검 결과(상처 종류와 부위 등) 등이 고려된다. 경험하지 못한 독특한 사건이나 현장을 접했다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연구, 실험을 하기도 한다.
(8) 마지막 단계에서는 혈흔 순서 정립을 통해 행위 순서를 판단하고, 전체 사건을 재구성한다. 그러면 대부분, 범인은 나타나게 돼 있다.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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