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격 명령·증언, 헬기 작전 계획 지침 등이 헬기 사격 근거
전투기·공격기 폭탄장착 대기했지만, 폭격 검토 확인 못해
국방부가 5·18 민주화운동 38년만에 1980년 5월 계엄군의 헬기사격을 공식 인정했다.
또 5·18 당시 공군은 제10전투·제3훈련 비행단에서 전투기·공격기에 폭탄을 장착한 채 대기한 것으로 확인됐지만, 실제 '광주행 폭격을 검토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5·18민주화운동 헬기사격 및 전투기출격대기 관련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는 7일 국방부 청사 브리핑룸에서 지난 5개월 간 조사한 결과를 최종 발표하고, "육군은 80년 5월 21일과 27일 공격헬기 500MD와 기동헬기 UH-1H를 이용, 광주시민을 향해 여러차례 사격을 가했다"고 밝혔다.
특조위는 계엄사령부가 헬기작전계획 실시지침을 전달한 점, 실제 사격 명령이 이뤄진 점, 무장 헬기로 광주 상공을 비행했다는 조종사들 진술, 육군 31사단에 무장헬기 3대가 대기하고 있었던 기록, 목격자 진술 등을 '헬기 사격의 근거'로 들었다.
'계엄군이 공수부대를 비롯한 상무충정작전에 참여한 육군 병력 등과 협동작전으로 공중에서 시민 상대 헬기 사격을 한 것을 처음으로 밝혀낸 것'이라고 특조위는 설명했다.
조사 결과 1980년 5월 21일부터 계엄사령부는 문서 또는 구두로 수차례에 걸쳐 헬기사격을 지시했고, 인적이 드문 조선대학교 뒤편 절개지에 AH-1J 코브라 헬기의 발칸포로 위협사격을 했다는 증언이 있었다.
"계엄군은 5월 21일 오후 7시30분 자위권 발동이 이뤄지기 이전에는 광주에 무장헬기가 투입되지 않았다"고 주장해 왔지만, 실제로는 5월 19일부터 31사단에 무장헬기 3대가 대기하고 있었던 사실이 군 기록을 통해 밝혀졌다.
계엄사령부는 5월 22일 오전 8시 30분께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에 헬기 사격이 포함된 구체적인 '헬기작전계획 실시지침'을 전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지침에는 "상공을 비행·정찰해 버스·차량 등으로 이동하면서 습격·방화·사격하는 집단을 지상부대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사격 제압하라" "지상부대 진입 시는 보병을 엄호하기 위해 전차와 헬기의 공중엄호 등을 계획 실시하라" "하천·임야·산 등을 선정해 위력 시위 사격을 실시하라" "시위 사격은 20㎜ 발칸, 실 사격은 7.62㎜가 적합"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특히 계엄사령부는 '헬기 사격 실시 전 3~5회의 경고방송을 할 것'을 지시했다.
'발칸 위협사격 실시로 양민 경고 분리 및 위압감·공포감 효과를 달성하라' '무장을 한 자나 사격을 하는 자는 사살하고, 계속 저항하는 자에게는 집중사격 하라'는 구체적인 경고문(방송) 내용도 밝혀졌다.
계엄사령부 부사령관 황영시는 5월 20일부터 26일까지 전교사 부사령관 김기석에게 4회에 걸쳐 '무장헬기 UH-1H 10대, 500MD 5대, AH-1J 2대 등을 투입해 신속히 진압작전을 하라'는 취지의 명령을 한 것으로 조사됐다. '코브라로 APC를, 500MD로 차량을 공격하라'는 명령도 있었다.
이밖에 5월 22일 '조선대 절개지와 광주천에 헬기로 위협사격을 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같은 날 103항공대장 등 조종사 4명은 'AH-1J 코브라 헬기 2대에 발칸포 500발씩을 싣고 광주에 출동했었다'고 증언했다.
5월 23일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김재명은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 김기석 부사령관 등에게 "왜 전차와 무장 헬리콥터를 동원해 빨리 광주사태를 진압하지 않고 그렇게 미온적으로 대처하느냐"고 질책한 뒤 사격명령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5월 24일에는 11공수여단장이 '63대대 병력이 보병학교 교도대로부터 공격을 받은 것을 시민군에게 공격을 받은 것'으로 오인, 103항공대장에게 '코브라 헬기로 무차별 사격을 하라'고 명령한 것으로 조사됐다.
특조위는 5월 21일 계엄군이 옛 전남도청 인근과 광주천을 중심으로 비무장 시민에게 직접 헬기 사격을 한 것을 두고 "비인도·야만·잔학·범죄성을 드러내는 증거"이자 "계획적·공세적 성격을 띄고 있다"고 평가했다.
5월 27에는 계엄군 특공대의 전남도청 진압과 시민군 제압을 위해 헬기 사격이 이뤄진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5·18 당시 헬기조종사 5명은 특조위 조사에서 "헬기에 무장을 한 상태로 광주 상공에서 비행했지만, 헬기사격은 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공군의 전투기 폭탄 장착 대기와 관련, 특조위는 "광주를 폭격하려는 계획에 따른 것인지, 공군에 의한 광주폭격을 포함한 진압작전계획으로 검토됐는지 여부"의 최종 결론을 유보했다.
특조위는 5·18당시 수원 공군 제10전투비행단에서 F-5에 MK-82 폭탄이, 사천 제3훈련비행단에서 A-37에 MK-82 폭탄이 이례적으로 장착된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광주를 폭격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확한 근거 자료와 공군 관계자들의 증언을 확인하지 못해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특조위는 "5·18과 관련 군 자료 원본을 찾기 어려웠고, 일부 기관의 비협조와 강제 조사권이 없어 조사에 많은 제한이 있었다"고 밝혔다.
국방부가 군에 불리한 자료를 의도적으로 은폐·왜곡해 5·18 관련 중요 내용들이 제대로 기재돼 있지 않거나, 마이크로 필름(MF)으로 전환하면서 보존 연한의 경과 등을 이유로 자료가 폐기됐다는 것이다.
특조위는 5·18 의혹들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관련 특별법이 조기에 마련되고, 독립적인 조사기관의 성역 없는 자료 수집과 관련자들에 대한 조사가 보장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또 5·18 민주화운동 진압은 '육군과 공군, 해군(해병대)의 3군 합동작전이었다'고 규명했으며, 반인륜적 범죄 행위인 헬기 사격에 대해 정부가 국민에게 깊이 사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특조위는 약 62만 쪽에 이르는 자료를 수집·분석했다. 5·18민주화운동 진압을 위해 광주에 출동했던 190개 대대급 이상 군 부대 및 관련 기관을 방문 조사했고, 당시 군 관계자들과 목격자 등 총 120명을 조사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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