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ㆍ삶 다룬 책 일본서 펴낸 다고 기치로 前 NHK PD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윤동주(1917~1945) 시인은 ‘서시’(1941)에서 그렇게 다짐한다. 일본 공영방송 NHK PD 출신인 다고 기치로(62)씨는 윤동주 연구를 ‘주어진 길’로 받아들였다. 30년 넘게 숙명을 붙좇은 결실을 ‘생명의 시인 윤동주: 모든 죽어가는 것이 시가 되기까지’(한울)에 담았다. 윤동주 탄생 100주년인 지난해 일본에서 나왔고, 얼마 전 국내에 소개됐다.
“윤동주를 모두가 사랑한다면, 그의 시 정신을 모두가 품는다면, 얼마나 좋은 세상이 될까요.” 최근 서울에서 만난 다고씨는 ‘윤동주빠’였다. 윤동주 시가 “삶의 지표”라고 했다. 도쿄대에서 문학을 전공한 다고씨가 윤동주를 만난 건 1984년이었다. 그해 일본의 작은 출판사가 번역해 낸 윤동주 시집을 읽고서다. “도쿄 행인 100명을 붙잡고 ‘윤동주를 아느냐’고 물으면 100명이 모른다고 할 때였죠. 그의 시는 완전히 달랐어요. 단순히 아름다운 게 아니라 인간의 진리, 삶의 진실을 가리키고 있었어요. 일본인들에게 윤 시인을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을 느꼈습니다.”
책은 다고씨가 발로 뛰며 연구하고 발굴한 윤동주 시와 삶의 기록이다. 그는 ‘생명’으로 윤동주 시를 읽는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서시’의 ‘죽어가는’을 영어 단어 ‘Mortal(필멸의)’로 해석한다. 죽을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 자체가 살아 있음의 증거이므로, 윤동주가 사랑하겠다고 다짐한 대상은 ‘모든 살아 있는 것’이라는 게 그의 해석이다.
윤동주를 생명의 시인이라고 정의하는 건, 그를 저항 시인으로 만든 일본의 잘못에 눈 감겠다는 뜻 아닐까. “일본의 죄를 피하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죽어가는 것’을 한국 민족과 문화라고 보는 게 한국인 입장에선 당연해요. 하지만 윤동주의 시는 좀 더 높은 곳에 도달했어요. 민족 시인, 저항 시인이 아니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렇게 가두기에는 그의 시 세계가 훨씬 더 넓고 깊었다는 겁니다.” 윤동주 소장 책 중 독일 철학서인 ‘근대 미학사’의 “죽어야 하는 창조자 시인”이라는 문구엔 밑줄과 동그라미 표시가 있다. ‘죽어야 하는’의 존재론적 의미를 윤동주가 깊이 성찰한 증거라고 다고씨는 풀이했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래 제목은 ‘병원’이었다. 윤동주 자필 시집 표지엔 ‘병원’이라는 제목을 썼다 지운 흔적이 있다. “병원이 뜻하는 죽음, 암흑, 절망을 딛고 도약한 겁니다. 연희전문(연세대) 졸업 기념으로 시집을 내려 했지만 그런 저항적 내용으로는 어렵겠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였죠. 고뇌를 만난 사람은 타락하기 마련이지만, 윤동주는 오히려 강해졌습니다. 윤동주는 내면에 칼을 지니고 있었어요. 다른 사람에게 향하는 칼이 아니라, 자신을 향하는 칼이었죠. 그게 ‘참회’와 ‘부끄러움’의 시어로 나타난 거예요. ”
윤동주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에 희생됐다는 주장은 미제로 남아있다. “저널리스트로서 끈질기게 추적했어요. 아우슈비츠 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다만 인근 큐슈대학 의사가 투옥자를 대상으로 개인적으로 그런 실험을 하려 했다면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윤동주 사망 50주기이자 광복 50주년인 1995년 다고씨는 KBS와 NHK가 공동 제작한 윤동주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당시 취재 과정에서 다고씨가 발굴한 것이 윤동주 생전 마지막 사진이자 일본에서의 모습이 담긴 유일한 사진이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황수정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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