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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용돈 보내고 안부 묻던, 그날은 그 아버지가 아니었다

입력
2018.07.10 04:40
수정
2018.07.17 08:04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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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의 씀씀이

이혼한 아빠와 문자 연락하던 딸

갑작스러운 독촉장ㆍ유흥비 명세서

평소와 다른 모습에 고모에게 연락

“3개월 전 가출신고” 뒤늦게 알아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용돈을 보내 달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내자 딸의 통장에 50만원이 바로 입금됐다. ‘돈 보냈다. 아껴 쓰거라.’ 되돌아온 문자 답변도 여전했다. 아버지 A(59)씨는 언제나 그랬다.

A씨는 1999년 이혼했다. 그 후 딸과는 떨어져 지내야 했지만, 꾸준히 용돈을 보내고 안부를 물어왔다. 용돈을 달라, 용돈을 보냈다는 문자메시지에 별다른 통화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몸만 떨어져 있을 뿐, 여느 부녀와 다른 건 없었다. 올해 3월 5일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채무독촉장’과 ‘신용카드 내역’이 딸에게 날아왔다. 처음이었고, 느닷없었다. 금리가 높은 저축은행에서 A씨가 돈을 빌렸다는 사실이 딸은 놀라웠다. 유흥주점에서 신용카드로 한 번에 200만원가량 결제했다는 건 더욱 믿기 어려웠다. 술을 즐기긴 했어도 씀씀이가 크지 않아 기껏해야 막걸리에 간단한 안주 정도 마시고 먹던 게 딸이 기억하는 아버지 모습이었다. 딸은 고모를 찾았다. 이혼 이후 아버지 근황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A씨 누나뿐이었다.

“고모, 갑자기 아버지가 돈을 너무 많이 쓰는 거 같아서요. 혹시 아시는 거 있으세요.” 조심스레 물었다. “안 그래도 네 아버지가 연락이 안 돼서 경찰에 가출 신고를 해 놨는데. 그건 무슨 소리냐.” 딸이 시작한 질문이 고모의 귀를 거쳐 더 많은 질문으로 돌아왔다. 2017년 12월 29일, 벌써 석 달 전 아버지는 가출 신고가 돼 있었다. 신용카드 내역에 찍힌, 2월의 유흥주점. 아버지가 가출을 한 뒤 유흥주점에서 그 많은 돈을 썼단 말이야?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곧장 경찰을 찾았다. 신고를 받은 전주 완산경찰서 여성청소년수사팀도 고개를 갸웃하긴 마찬가지였다. 가출 신고 뒤 경찰은 A씨가 휴대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문자메시지를 보낸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심지어 A씨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직접 통화도 했다. “네네, 가족들한테 연락할게요.” 그 답을 들은 한 경찰은 재차 들어온 신고가 이해가 안 됐다. ‘아직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건가? 그럼 그 사람은 누구지?’

#증거는 없고 정황만

아빠와 함께 일한 환경미화원 조사

가방에서 아빠 명의 통장 나와 체포

집에선 병원진단서 위조서류까지

시신ㆍ살인도구 아무것도 발견 안 돼

가출 신고와 의문의 씀씀이. 경찰은 A씨 휴대폰을 사용하면서 경찰과 통화하고, 딸에게 문자메시지와 용돈을 보내는 인물이 과연 ‘신고한 딸의 아버지가 맞는지’ 확인부터 하기로 했다. A씨 주변을 빠르게 훑어 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전주 완산구청에서 A씨와 환경미화원으로 함께 일한 이모(50)씨 집 주소로 A씨가 택배를 보낸 흔적을 발견했다.

이씨를 경찰이 불러들였다. 그는 “최근에도 보긴 봤는데 지금은 A씨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더 물어봐야 그 답 말고는 들을 수 있는 게 없었다. 이씨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어 근데, 이게 뭐지?” 돌아간 이씨 자리에 가방이 놓여져 있었다. 실수로? 혹은 의도적으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가방에서 놀라운 물건이 발견됐다. ‘A씨 이름으로 된 통장’이었다.

“이거 심상치 않습니다.” 여성청소년수사팀장이 강력1팀장에게 말했다. 단순 실종 사건이 아닐 수 있겠다 싶었다. “딸이랑도 연락하고 용돈도 보내던 사람 통장이 갑자기 이씨 가방에서 나왔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범죄와 연결됐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강력팀장 눈빛이 순간 반짝였다.

사건은 바로 강력팀으로 넘어갔다. 경찰은 다음 날 이씨를 다시 불렀지만 이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씨 집을 가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집 근처 폐쇄회로(CC)TV를 보던 강력1팀원이 소리를 질렀다. “짐 싸서 나갔습니다. 아무래도 도망간 거 같습니다!”

몸은 떠났지만 단서는 남았다. 집을 수색하면서 A씨 ‘휴직계’와 ‘병원 진단서’를 발견했다. A씨는 2017년 5월 27일부터 척추 디스크로 휴직 상태였다. 경찰은 진단서를 발부해준 것으로 돼 있는 경기 광명시 한 병원과 휴직계를 받은 완산구청에, 진짜 진단을 받고 서류를 제출했는지 확인했다. 구청은 휴직계를 팩스로 받아 A씨가 직접 서류를 냈는지 알 수 없다는 답을 보내왔다. 하지만 병원은 “A씨가 병원에 온 적이 없다”고 했다. 진단서 양식 자체가 병원에서 평소 사용하던 것과 달랐다. 척추 디스크 진단은 허위였고, 진단서는 위조된 것이었다. “사문서 위조 혐의로 일단 체포까지는 가능하니 신병부터 빨리 확보합시다.” 팀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씨가 시내버스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로 간 뒤 서울을 거쳐 인천 부평구 지하철 1호선 백운역으로 이동한 흔적은 CCTV 등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백운역 근처에서 이씨 행적을 뒤쫓던 경찰은 한 PC방 앞에 다다랐다. 그 순간 이씨와 비슷한 인상 착의를 한 남성이 걸어 들어갔다. 경찰은 PC방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는 이씨에게 다가갔다. “이00.” 이름을 부르자 이씨는 대답은 않고 경찰을 빤히 쳐다봤다.

당장 경찰서로 이씨를 데려왔지만, 수사팀의 머리 속은 복잡했다. “A씨 부탁을 받고 일부러 자취를 숨겨주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씨가 A씨를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봤죠.” 관건은 진술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살인 현장이 나온 것도, A씨 시신이 발견 된 것도, 이씨 집에서 살인 도구가 나타난 것도 아니었다. ‘증거는 없는데 냄새는 고약하게 풍기고, 이걸 어쩐다…”

“(시신) 어디에 묻었어?” 밑도 끝도 없는, 갑작스런 질문이었다. 사문서 위조로 잡혀 온 피의자라면 그냥 무시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이씨는 당황했다.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럴수록 질문의 강도는 세졌다. “어디에 묻었어. 빨리 털어놔.” 잠시 후 이씨가 입을 뗐다. “제가 죽였습니다.” 가끔은 꼬일 데로 꼬인 실타래를 중간에 끊어버릴 때가 나을 수도 있다. 새로 잡은 시작점이 바로 실마리가 되곤 한다. 강력1팀장의 느닷없는 질문이 이번 사건에서는 단절(斷切)이고 실마리였다. 이씨가 범행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실마리가 한 번 잡히니 실타래가 술술 풀려나갔다.

[저작권 한국일보]환경미화원 살인사건범행 당일 및 이후 행적. 강준구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환경미화원 살인사건범행 당일 및 이후 행적. 강준구 기자

#너무 치밀한 범행

“술 마시고 다투다 홧김에 그만…”

이불로 시신 감싸 쓰레기처럼 위장

소각장서 흔적 없이 ‘완벽 처리’

우발적 범행치고는 앞뒤 안 맞아

“8700만원 빌린 돈 독촉에…”

강도 살인 혐의 적용 1심 재판 중

2017년 4월 4일 오후 5시. 완산구청에서 15년가량 함께 환경미화원을 하면서 알게 된 이씨와 A씨는 이날도 여느 때처럼 이씨 집 근처 중국집에서 술을 한 잔 기울였다. 그러곤 1시간30분 뒤, 술을 한 잔 더 하겠다며 둘은 이씨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A씨가 이씨가 쓰고 있던 가발을 잡아 당기며 욕설을 했다는 것이다. 이씨가 홧김에 주먹을 휘둘렀고, 둘은 몸싸움을 벌였다. 싸움은 이씨가 A씨 목을 조르면서 끝이 났다.

“정말 홧김에 죽였습니다.” A씨는 우발적인 범행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경찰은 이씨의 “홧김에 죽였다”는 진술이 의심스러웠다. 그러기엔 시신을 유기하는 과정이 너무 치밀했다. 이씨는 A씨 시신을 자신이 살고 있는 원룸에 다음날인 5일 오후 6시쯤까지 그대로 뒀다. 철물점에서 사온 50ℓ짜리 검은색 비닐봉투 15장으로 시신 상반신과 하반신을 몇 겹으로 싸고, 이불로 시신을 감쌌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불 위에 다시 100ℓ짜리 종량제 쓰레기봉투 2장을 덧씌웠다. 겉으로만 보면 누가 이불을 종량제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리는 걸로 볼 수밖에 없었다.

환경미화원은 크게 둘로 나뉜다. 쓰레기수거차량을 운전하는 사람, 쓰레기수거차량에 쓰레기를 던져주는 사람. 이씨는 ‘쓰레기를 던져주는 사람’이었다. 이씨가 매일 새벽 쓰레기를 수거하는 구역이 정해져 있었다. 이씨는 이 구역에 ‘쓰레기’로 위장한 시신을 미리 가져다 놓았다. 이튿날인 6일 오전 6시10분쯤 이씨는 평소처럼 자신이 담당하는 구역을 돌며 쓰레기를 수거했다. 자신이 전날 가져다 놓은 A씨 시신 역시 함께 일하는 동료와 함께 쓰레기수거차량에 던져 넣었다. 심지어 혼자 들기는 어려워 동료에게 “이게 좀 무겁네. 같이 좀 들지”라고 하면서.

쓰레기차량은 그대로 전주시내 한 소각장으로 이동했다. 소작장에 도착한 차량들은 큰 소각장 입구에 싣고 있던 쓰레기를 그대로 쏟아 낸다. 그러면 대형 기계가 쓰레기를 집어 그대로 불구덩이로 집어 넣는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쓰레기 사이에 시신이 있는 지를 확인하긴 쉽지 않다. 더더욱 소각 이후에 가끔 동물 뼈가 나오기도 해, 혹여 ‘뼈’가 나온다 해도 소각장에서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씨가 이런 걸 다 알고, 시신을 그곳에 처리한 거죠. 환경미화원 일만 15년을 했으니.” 시신은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게 됐다.

시신 유기에 성공한 이씨는 본격적으로 A씨가 ‘살아있는 것처럼’ 꾸며내기 시작했다. 시신을 처리한 6일 바로 A씨인 척하면서 ‘병가’를 냈다. 5월 27일에는 위조한 병원진단서와 휴직계 서류를 완산구청에 팩스로 제출한 뒤 전화로 1년 휴직을 신청했다. “허리 디스크 때문에 일을 쉬어야 할 거 같습니다.” 당장 1년 동안 직장에는 A씨가 나가지 않아도 누구 하나 의심할 사람은 없었다.

A씨 휴대폰을 사용하면서 딸과도 연락했다. 딸에게 정기적으로 용돈을 보내고 문자메시지를 한 것 외에도, 딸에게 ‘아빠가 연말정산을 해야 하는데 통장 비밀번호가 기억이 안 나네. 혹시 기억나니’라고 물어 A씨가 사용한 비밀번호를 알아냈다. A씨 이름으로 금융거래를 하려면 비밀번호가 필요했다. A씨 신분증, 신용카드, 휴대폰 등을 이용해 대출과 신용카드 결제 등 5,700여만원을 쓰면서 1년 가까이 ‘위장극’을 펼쳤던 것이다. 이씨는 그렇게 A씨로, 두 사람으로 살아갔다.

경찰은 이씨가 ‘돈’ 때문에 A씨를 죽였다고 봤다. 사건 발생 전 이씨는 A씨에게 8,700만원을 빌렸고, 다른 지인들에게도 돈을 빌려 이미 월급의 절반이 압류돼 있었다. 돈을 갚으라는 독촉이 살인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씨는 끝까지 채무 관계로 인한 살인이 아니라고 발뺌했다.

경찰은 이씨에게 ‘살인 및 사체 유기’ 혐의를 적용하고, 강도 살인을 예비 혐의로 적용해 검찰에 송치했다. 강도 살인은 단순 강도뿐 아니라, 채무자가 자신의 채무를 갚지 않기 위해서 채권자를 살인했을 때도 적용 가능한 혐의다. 이후 검찰은 경찰 판단을 받아들여 강도 살인까지 적용해 재판에 넘겼고, 현재 이씨는 1심 재판을 받고 있다.

전주=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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