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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활약했다는 ‘원숭이 기병대’ 실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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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활약했다는 ‘원숭이 기병대’ 실존했다”

입력
2018.09.06 04:40
수정
2018.09.06 11:16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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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나라 특수부대 ‘원병’ 300마리 

 택리지 등 여러 문헌ㆍ그림서 묘사 

 “변장한 병사 아닌 진짜 원숭이 

 소사전투 후 유정 휘하에 있기도”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는 역사비평 가을호에 낸 논문에서 임진왜란 때 원숭이 기마부대가 투입됐다는 주장을 담은 논문을 내놨다. 2001년 개봉한 영화 '혹성탈출' 같은 장면이, 실제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는 역사비평 가을호에 낸 논문에서 임진왜란 때 원숭이 기마부대가 투입됐다는 주장을 담은 논문을 내놨다. 2001년 개봉한 영화 '혹성탈출' 같은 장면이, 실제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임진왜란 때 활약했다는 명나라 ‘원병삼백(猿兵三百ㆍ원숭이 병사 300명)’은 실화였을까. 전설처럼 내려오던 ‘원병삼백’ 이야기의 실체에 다방면으로 접근한 논문이 나왔다. 원숭이 부대는 실제로 있었으며 중국 남부 원숭이로 구성된 이 부대는 유정 휘하에 있기도 했다는 주장이다.

‘원병삼백’을 추적해 온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는 그동안 연구의 집대성이라 할 논문 ‘소사전투에서 활약한 원숭이 기병대의 실체’를 최근 발간된 역사비평 가을호에 발표했다.

안 교수는 이중환(1690~1756)의 택리지(擇里志) 정본을 내기 위해 여러 판본을 비교 검토하는 과정에서 원숭이 부대 문제에 접했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지금의 천안인 소사 전투에서 명나라의 양호 장군이 승리해 일본군의 북진을 차단했다. 이중환은 이 전투와 관련 이렇게 썼다. “거리가 100여 보가 되기 직전에 먼저 교란용 원숭이를 풀어놓았다. 원숭이는 말을 타고 말에 채찍을 가해서 적진으로 돌진하였다. (중략) 적진으로 바짝 다가서자 원숭이는 말에서 내려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왜적들은 원숭이를 사로잡거나 때려잡으려 하였으나 원숭이는 몸을 숨기고 도망 다니기를 잘해서 진영을 꿰뚫고 지나갔다.” 소사 전투는 평양, 행주산성 전투와 함께 임진왜란 시기 육군의 삼대첩(三大捷)으로 꼽힌다.

이중환의 택리지. 수많은 판본이 있는데 원숭이 기마부대 이야기는 공통적으로 실려 있다. 성호기념관 소장
이중환의 택리지. 수많은 판본이 있는데 원숭이 기마부대 이야기는 공통적으로 실려 있다. 성호기념관 소장

안 교수도 처음엔 가볍게 생각했다. 택리지엔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많으니 그런 이야기 중 하나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문헌을 파면 팔수록 원숭이 부대 얘기가 더 나왔다. 소사 전투의 승장, 양호 장군을 칭송하기 위해 왕명을 받아 연암 박지원이 지은 글 ‘경리 양호 치제문’에도 “농원삼백(弄猿三百)이 말을 달렸다”는 구절이 나온다. ‘적진을 교란하는, 300마리의 원숭이 부대’가 있었다는 얘기다.

의병장 조경남(1570~1641)이 쓴 ‘난중잡록’에는 소사 전투 이후 남원으로 집결 중이던 유정 부대를 묘사하는 대목이 있다. 여기에도 “초원(楚猿) 4마리가 있어 말을 타고 다루는 솜씨가 사람과 같았다. 몸뚱이는 큰 고양이를 닮았다”는 구절이 있다. 초원이란 중국 남부에서 온 원숭이라는 의미다. 왜란 때 신녕현감을 지낸 손기양(1559~1617)이 남긴 일기에도 이 ‘초원’이 나타난다. 집안의 종을 유정 부대에 보냈던 모양인데, 그 종이 돌아와서는 “(유정) 군대의 위용이 장엄하고 또한 초원(楚猿)과 낙타가 있는데 원숭이는 능히 적진으로 돌진할 수 있고”라고 보고했다는 구절이 있다.

이런 문헌 기록을 보면 안동의 풍산 김씨 문중에 전하는 그림 ‘천조장사전별도(天朝裝士餞別圖)’의 비밀이 풀린다는 게 안 교수의 주장이다. 제목 그대로 전쟁 뒤 명나라 군인들이 귀국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인데, 왼쪽 아래를 보면 ‘원병삼백(猿兵三百)’이란 깃발 아래 원숭이가 그려져 있다. 그림에 대한 설명문을 보면 14만2,305명의 명나라 군사가 살아 돌아간다는 설명과 함께 “형초(荊楚)의 청원(靑猿) 300명은 본디 양호가 인솔해왔는데, 직산(소사)전투에서 기용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는 구절이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귀국하는 명나라 군대를 그린 '천조장사전별도'. 왼쪽 아래에 '원병삼백' 깃발 아래 원숭이 부대가 묘사되어 있다. 역사비평 제공
임진왜란이 끝난 뒤 귀국하는 명나라 군대를 그린 '천조장사전별도'. 왼쪽 아래에 '원병삼백' 깃발 아래 원숭이 부대가 묘사되어 있다. 역사비평 제공
'천조장사전별도'의 왼쪽 아랫부분 확대. 역사비평 제공
'천조장사전별도'의 왼쪽 아랫부분 확대. 역사비평 제공

안 교수는 “10여년 전 ‘천조장사전별도’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 ‘원병’을 다들 ‘날랜 병사’ 혹은 ‘변장한 병사’쯤으로 이해했다”면서 “그러나 여러 문헌을 볼 때 ‘원숭이 부대’가 실존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명나라 장수 양호가 중국 남부의 원숭이 기병대를 이끌고 참전했고, 명나라 내부 문제로 양호가 본국으로 소환되자, 원숭이 기병대는 유정 부대로 이관됐다는 얘기다.

중국 기록에서 원병을 찾아내면 입증이 확실한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안 교수는 “포르투갈 출신 흑인 수군을 ‘해귀(海鬼)’라 했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선조가 이들과 대화를 나눈 기록이 있지만 정작 중국 기록엔 언급이 없다”면서 “중국 입장에서야 소규모 특수부대까지 일일이 기록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조선은 신기하게 여겨 기록해둔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 임진왜란 당시 손오공 부대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주장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 임진왜란 당시 손오공 부대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주장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안 교수는 대신 임진왜란 훨씬 이전 명나라 장수 척계광(1528~1588)이 원숭이 부대를 운용했었다는 명나라 기록을 간접증거로 제시했다. 그는 “너무 흥미로운 이야기라 국내는 물론, 중국이나 일본 쪽 임진왜란 혹은 전쟁사 연구자들에게 이번 논문을 한번 보내볼 생각”이라 말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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