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는 차나 술 올리는 간단한 예… 기제사와 혼동
음식종류 정해진 것 없어… 여자도 제사 참여가 원칙
동방예의지국의 후손이라면 명절 아침엔 상다리 휘어지는 차례상을 차려내야 할까. 유교 사상을 계승하는 성균관 유림들의 대답은 그러나 명백히 ‘노(NO)’다. 이들은 되레 명절마다 중증 명절증후군의 주범이자 가부장제의 적폐로 유교가 호명되는 게 억울하다는 표정이다.
13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 명륜당에서 만난 서정택(68) 성균관 전례위원장과 박광영(46) 성균관 의례부장은 “차례는 말 그대로 차(茶)나 술을 올리면서 드리는 간단한 예(禮)를 뜻하는데, 이를 기제사상과 혼동해 거나하게 차려내는 관습과 과시욕이 명절의 참된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성균관은 전국 234개 향교와 더불어 유교 사상과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국내 유교의 총본부 격이다. 예절 상담을 통한 생활의례 보급, 전통문화 계승을 위한 출판사업 등을 해왔다. 그중 전례위원회와 의례부는 각종 유교 의례의 고증 연구 진행을 도맡는 조직이다. 두 조직을 이끄는 이들에게 ‘과시형 차례상’과 명절증후군의 배경을 물었다.
알려진 차례상, 유교식이 아닌가
서정택 전례위원장(이하 서)=차례는 기일에 올리는 기제사와는 다르다. 추석이나 설날에 차를 올리면서 드리는 예를 뜻한다. 조상에게 해가 바뀌고, 새로운 계절이 찾아왔음을 알린다는 취지로 기제사의 축소판으로 봐야 한다. 새로운 음식, 즉 곡식이나 과일이 나오면 그걸 조금 올려 조상께 인사한다는 의미다. 그것들을 기제사와 오인해서 너무 거창스럽게 하다 보니까 일이 너무 많아졌고, 이를 전담하게 된 주부들이 버거워졌다. 간소화해 힘든 일을 줄여 나가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바뀐다.
박광영 의례부장(이하 박)=말씀하신 대로 정말 간단한 음식을 준비해 지내는 것이 차례의 본질이다. 보통 술을 올리고 설에는 떡국, 추석에는 송편과 곁들일 안주 정도로 생각하면 충분하다. 명절을 기념해서 그때 나오는 과일 정도를 술과 올리는 건데, 오해가 많이 쌓였다.
서=올리는 술의 횟수만 봐도 제례와 차례는 다르다. 제례는 석 잔을 올리는데, 차례는 한 잔만 올린다. 절차는 지방과 가문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축문 없이 한 잔만 올리는 원칙이 보편적이다. 반드시 무엇을 차려내야 한다는 게 아니라 한 가지를 마련하더라도 정성으로 준비하면 된다.
박=맞는 말씀이다. 술ㆍ포ㆍ적ㆍ과실 정도로 간단히 차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동육서, 홍동백서는 어떤가
서=그걸 유교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오해다. 어동육서, 홍동백서, 두동미서는 추후에 나온 개념이다. 유교 예서에는 어디를 보더라도 그런 내용이 없다. 이를테면, 대표적 예서인 주자가례, 국조오례의, 사례편람, 격몽요결 등의 문헌에 기제사의 진설도가 나오지만 저런 기준은 없다. 1열에 과일을 네 접시(사례편람) 정도 놓으면 된다거나, 여섯 접시 놓으면 된다거나(주자가례) 하는 것은 있다. 과일 종류를 정해놓지도 않았을뿐더러 이조차도 기일에 지내는 기제사상을 차리는 진설법이다.
박=돌아가신 날에 지내는 기제사와 차례를 구분하지 않고 일단 제사상이라고 하면 과시형으로 차려내면서 오해가 쌓인 것 같다. 기제사상은 사실 살아 계실 때 하지 못한 효를 뒤늦게라도 다한다는 의미에서 있는 정성 없는 정성을 다하는 측면이 존재했다. 차례상마저도 그런 기제사상에 맞추다 보니까 명절 차례가 거창해진 폐단이 생기지 않았나 싶다. 특히 예전에는 기제사는 사당에서 지내고, 명절 차례는 집에서 지내지 않았나. 차례를 지낼 때 사당에서 하던 기제사상의 형식을 빌려 오다 보니까 혼용이 된 게 아닐까. 결국 차례상이 지나친 모습이 되지 않았나 싶다.
서=우리가 자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많이 준비하진 않았는데, 오히려 돈이 풍족해져서 조상을 제대로 숭배하려면 많이 차려야 하지 않겠나라는 생각이 반영된 측면도 있어 보인다.
박=세태도 무시할 수 없을 거다. 뭐든지 남을 의식하고 비교하고 물질을 숭상하는 풍조가 팽배하다 보니까 이런 현상이 발생한 측면도 있지 않나 싶다.
신분제 철폐 후 오히려 제사상이 화려해졌다는데
서=상당히 관련이 많다. 과거엔 서민과 양반이 지내는 제사 횟수부터가 달랐다. 3품관 이상은 고조부까지 4대 봉사를 지내고, 6품관 이상은 증조부까지 3대 봉사, 7품관 이하 선비들은 조부모까지 2대 봉사를 하고, 서민들은 부모만 제사를 지냈다(조선조 경국대전). 1894년 갑오경장이 일어나고 반상이 무너지면서, 모두가 너도나도 높은 양반처럼 4대 봉사를 하는 현상이 생겨났다. 무리해서라도 일반 서민들이 양반식 차례 음식을 준비하다 보니 부담이 컸는데도 그랬다. 그런 정서가 이제까지 계속 내려오다 보니까 문제가 많이 됐지 않았나 싶다.
박=예는 간소하게라도 공경하는 마음을 많이 갖춰야 하는데, 어떻게 보면 허례허식에 빠지는 것 같다. 높은 벼슬이 있는 집인 양 4대 봉사 하는 것이 최고이고, 2대 봉사만 하면 우리 집이 상놈 취급받는다는 인식이 1960년대까지도 이어졌다. 상은 최대한 기억을 더듬어 만든 기준으로 차리게 됐다. 사실 어동육서만 해도 한국식 기준은 아니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바다가 동쪽, 육지가 서쪽 아닌가. 그래서 생선이 동쪽, 고기가 서쪽인데 예서에는 어디를 봐도 이런 내용이 없다. 오히려 ‘구할 수 있는 간단한 과일을 올리라’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조상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필요하고 가족이 모였으니까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마음이 중요한데, 그런 차례를 지내는 본질이 왜곡됐다.
피자 등 음식 종류 무관한가
서=예서 어디를 봐도 ‘반드시 이걸 놓아라’ ‘저건 놓지 말라’는 규율은 없다. 지방마다 나는 과일이 모두 다르고, 사는 지역에 따라 바닷가에서 나는 것, 산에서 나는 것이 모두 같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가례(家家禮)라고 하는 것이다. 그 지방에서 나는 음식, 구하기 좋은 것, 그 계절에 나는 과일을 나름대로 올린다는 게 유일한 기준이다.
박=맞는 말씀이다. 오해와 달리 유교는 현실 중시의 종교다. 지금 같으면 조상님들이 맛보지 못한 음식 구해서 드리는 것도 하나의 예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니면 평소 좋아하셨던 음식을 무엇이든 올리는 것도 상관없다. ‘어떤 음식을 넣어야 한다’ ‘빼야 한다’는 식으로 종류에 집착하지 말고 정성의 마음을 담는 데 의미를 두면 좋지 않겠나.
상을 간소화한다면
서=말 그대로 내가 준비할 수 있는 만큼만이 기준이다.
박=그 집안의 형편과 상황에 따라, 남을 의식하지 말고 하면 된다. 공경하는 마음을 기본으로 한 최소한의 정성이 필요한 거다.
서=정말 옛날에는 찬물 한 그릇 밥 한 그릇을 떠놓고 지낸다고도 했다. 그 이상의 기준이 필요 없다. 굳이 너무 많이 준비하다 보니 여러 군데 고장 나는 데가 많은데 그럴 필요가 없다.
두 분의 댁에선 어떻게 하나
서=보편적으로 지낸다.
박=저희는 간소하게 하고 있다. 사실 저희도 여기까지 오는 데 15년 정도 걸렸다. 여전히 집안 어른들께서 좋아하시진 않는다. 처음엔 ‘예전에 우리는 이렇게 안 했는데, 왜 이제는 없는 듯이 하느냐’고도 하셨다. 물론 지금은 간소화 취지에 공감해 주신다. 저희 상을 보면 추석에는 송편, 설에는 떡국, 거기에 술과 안주에 해당하는 구운 고기 한두 가지, 과일만 올린다. 저장된 곶감 사과 배 정도. 추석에는 햇과일 몇 가지 중심으로 올린다. 다 손이 많이 가지 않고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 위주다. 적, 과일 중 그 시기의 대표 음식 몇 가지를 올린다고 생각하면 좋다.
노동을 여성들만 하는 것도 유교식 아닌가
서=요즘에도 준비를 같이 안 하는 남자분들이 있나? 그것 참 잘못됐다. 기본은 여자들만 하는 게 아니라 남성들도 같이 봉양을 해야 하는 게 맞다.
박= 저희 집 같은 경우만 해도 어느 순간부터 준비 단계에서부터 역할을 다 나눈다. 꼬치 끼우기, 밀가루 묻히기, 계란 묻히기 등을 분담해 함께 한다. 내 일 네 일 없이 모든 사람을 다 참여시키고, 음식을 다 만들고 난 다음에는 참여하지 않으면 아이들에게도 오히려 야단을 친다. 자연스럽게 다 같이 해야 한다. 나만 하는 게 아니고 모두 참여한다는 의미를 가르치는 데 명절의 의미도 담겨 있지 않나 싶다.
서=정말 인식이 잘못됐다. 저희가 예의를 가르칠 때도 부부가 서로 존댓말 쓰고 절을 해도 맞절을 하라고 하는데, 오히려 아직 현실에서 여성만을 핍박한다고 하면 인식이 참 잘못됐다.
절은 남성들만 올리기도 하는데
서= 제사에는 여성들도 참여하는 게 원칙이다.
박= 잘못 알려졌다. 첫 번째 술을 올리는 사람은 집안의 대표자, 흔히 아버지가 하는 게 맞는데 두 번째 술을 올리는 사람은 배우자 즉 어머니다. 예를 잘 몰라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서= 그렇다. 첫 술은 장자가, 두 번째 술은 장자의 아내가 올린다.
박= 준비는 여성들만 하고 차례에는 남성들만 참여한다는 식의 인식 자체가 유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됐다. 항상 함께 준비하되 다만 할 일이 좀 달랐던 거다. 이제라도 아버님 어머님이 솔선해서 같이 준비하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 주면서 새로운 명절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오히려 예법을 중시하는 가문에서는 남성이 음식준비를 했는데, 그게 바른 모습이고 예법에 맞는 거다. 지금도 종택(宗宅)에 가면 나이 든 종부, 종손들이 시장 갈 때도 물건을 다 들고, 그릇에 담는 일도 남성들이 한다. 차례에는 다 같이 참여한다.
일각에선 제사, 차례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데
서=부모 세대가 워낙 힘들게 이런 제사나 차례 등을 해오는 모습을 보고 자라다 보니까, ‘우리는 이걸 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고 그게 자연스러운 것 같아 안타깝다. 지금 우리를 존재하게 한 조상을 숭배하는 마음이 중요한데, 과시와 허례허식으로 차례가 힘들고 거추장스러운 일이 돼 버린 점이 아쉽다.
박=명절 같은 경우 조상도 기리지만 대부분 살아 있는 내 부모에 대한 공경하는 마음, 형제자매의 우애를 다지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명절증후군 예방 위해 조언한다면
서=역할 분담을 잘해서 제수 준비를 해오면 좋지 않겠나 싶다. 거한 상을 차려 과시하려는 분들도 있고, 그마저도 안 하려는 분들도 있고 다양하다. 물론 여전히 문의는 많이 온다. 하루에도 20~30통씩 전화를 받는다. 제사나 차례는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질문이다. 대체로 ‘각 집의 형편대로 하시라’고 말씀 드린다. 농경시대에는 시간에 구애가 없었으니 무조건 예서의 기준을 따르지만, 지금은 직장 생활을 하시는데 그럴 수 없어 바꿔 지내더라도 무리가 없지 않나.
박=차례는 남은 가족들 중심이다. 좋아하지 않고 못 먹는 음식을 많이 하느라 고생하고 며느리는 내내 일만 하는 모습은 잘못됐다. 함께 모여 같이 간소한 음식을 마련해 예를 갖추고 여행을 가든, 친목을 도모하든 하는 식으로 명절의 의미, 나를 있게 해 준 조상님의 은혜를 생각했으면 한다.
글ㆍ사진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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