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현대사에서 지난 100년이 모더니티 형성의 역사였다면, 이 모더니티를 구성하는 세 요소는 자본주의, 민주주의, 민족주의였다. 노동은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핵심 영역이자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핵심 과제를 이뤄 왔다.
현대 사상에서도 노동은 주요 주제였다. 예를 들어,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실존적 조건을 ‘노동’, ‘작업’, ‘행위’에서 찾았다. 생계를 위한 노동, 가치를 추구하는 작업, 타자와 소통하는 행위가 인간의 존재적 본성이라는 것이다. 사회사상가 위르겐 하버마스 또한 인간의 고유한 특성을 ‘노동’과 ‘상호작용’에서 구했다. 노동이 자연을 변형시키는 생산 활동이라면, 상호작용은 인간들 사이의 교류 활동이다. 넓게 해석하면 노동은 경제를, 상호작용은 정치와 문화를 이룬다.
우리 현대 지성사에 노동문제를 탐구한 사회과학 저작들은 적지 않다. 노동과정ㆍ노동시장ㆍ노사관계ㆍ노동자계급을 분석한 노동경제학 및 노동사회학 연구들은 주목할 만하다. 사회학자 구해근의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은 대표적인 성과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이러한 노동문제를 다룬 주목할 문학 작품이 작가 조세희의 연작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다. 이 소설은 작가 황석영의 ‘객지’와 ‘삼포로 가는 길’, 작가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와 함께 1970년대 노동소설을 대표했다. 특히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산업화 시대 노동문제를 이해하는 필독서의 하나로 자리 잡았고, 노동문제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결코 작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노동문학의 새로운 지평 열어
조세희는 1942년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났다. 경희대에서 국문학을 공부했고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돛대 없는 장선’이 당선됨으로써 등단했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1970년 중반 이후 ‘난장이’ 연작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연작을 모아 1978년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발표했다. 이 소설집으로 그는 1979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그는 ‘시간 여행’ 등의 작품들을 내놓았다.
1960~70년대 산업화 시대는 그 명암이 선명했다. 텔레비전, 냉장고, 자동차의 보급과 함께 생활양식의 일대 변화가 진행되는 동시에 이 과정에서 계급 간 빈부격차가 여지없이 표출됐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당시 노동자계급의 경제적ㆍ사회적 빈곤을 담고 있다. 이 연작 소설은 두 가지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첫째, 이 연작은 일용 노동자 가족의 강제 철거와 이로 인한 아버지의 자살, 그리고 그 아이들이 노동자가 돼가는 과정을 다양한 시점에서 다룬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과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에서 볼 수 있듯, 고도성장에 가려진 노동자계급의 생존에 가까운 삶을 이 소설은 생생히 재현한다.
둘째, 조세희는 전통적 수법이 아닌 네오리얼리즘과 유사한 방식으로 노동자들의 세계를 묘사한다. 시점 이동, 시간 중첩, 단문의 반복 사용, 환상적 상황 설정 등의 기법을 활용해 당시 빈부격차의 현실을 서늘하고 아프게 전달한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는 구절은 조세희적 표현을 잘 보여준다. 문학적 상상력에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과학적 인식을 더함으로써 조세희는 우리 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살기가 너무 힘들다. (…) 그래서 달에 가 천문대 일을 보기로 했다. 내가 할 일은 망원렌즈를 지키는 일이야.” 소설의 주인공 난장이가 둘째 아들 영호에게 하는 말이다. 난장이는 달나라로의 여행을 꿈꾼다. 그러나 현실에선 벽돌공장 굴뚝 속으로 떨어져 죽는다. 환상적 기법을 구사하지만 이렇듯 조세희는 리얼리스트의 관점을 고수한다.
◇노동의 중요성 선구적 계몽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두루 고평(高評)을 받았다. 문학평론가 염무웅은 말한다. “작가는 비상하게 날카로운 촉수로 이들의(노동자들의) 삶의 조건과 양상을 파헤침으로써 70년대 한국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로 제기된 우리 노동 현실의 심층을 해부한다. (...) 조세희의 일련의 작품들은 그리하여 오늘의 우리 문학에 새로운 비약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비판적 평가 또한 없지 않았다. 국문학자 김윤식과 정호웅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자본가와 노동자의 단순한 이분법적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인식의 단순성과 극단적일 정도의 윤리적 순수성은 탐구를 거치지 않은 이념의 일방적 제시를 낳는다”고 평가한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 현대사에서 산업화 시대는 자본 대 노동이라는 대립 구도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시기였다. 노동자계급의 물질적 조건은 과거보다 향상됐지만, 빈부 격차가 중요한 사회 문제로 부상했다. 노동자계급은 장시간 노동 등 열악한 노동과정에 놓여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공돌이’, ‘공순이’란 말에서 볼 수 있듯 부당한 사회적 대우를 받았다.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계급의 상태를 분석한 대표적인 사회과학 저작이 앞서 말한 구해근의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이다. 많은 사회과학자들은 노동을 생산요소 또는 비교우위의 요소로만 파악하고, 노동하는 사람들의 인간적인 경험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등한시했다. 이에 맞서 구해근은 제1세대 노동자들이 어떻게 근대적 노동세계에 적응하며 자신들의 새로운 노동경험을 스스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는지를 주목한다.
“어떻게 공장 노동자들이 공순이ㆍ공돌이처럼 노동자를 경멸하는 문화적인 이미지와 국가가 강제한 산업전사라는 타의적 정체성을 극복하고 노동자로서 자신들의 집합적 정체성을 발전시키게 되었느냐”가 구해근이 던지는 질문이다. 공장 노동자, 노조 활동가, 노동문제 전문가와의 면접과 국내외 자료 및 연구에 대한 조사를 통해 그는 노동계급 형성의 역동적인 과정을 분석하고 또 재구성한다.
민주화 시대가 열리면서 노동문제는 우리 사회의 주요 의제가 됐고, 노동운동은 시민운동과 함께 양대 사회운동이 됐다. 노동에 대한 올바른 접근 없이 한국 산업화와 민주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노동자계급은 산업화의 진정한 주역이었다. 동시에 노동 존중은 질 높은 민주화로 가는 핵심 조건을 이룬다. 이러한 노동문제의 중요성을 계몽하는 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선구적인 역할을 맡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노동의 미래
오늘날 노동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청년실업, 비정규직, 노후 일자리 등에서 볼 수 있듯, 노동문제는 중대한 경제 및 사회정책 과제다.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추진된 최저임금 인상에서 볼 수 있듯, 노동문제는 계층에 따라 손익이 분명하기 때문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노동의 미래다. 적지 않은 지식인들은 노동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 전망을 제시한다.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을 주목한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적지 않은 노동자들을 실업자로 전락시키는 암울한 미래를 그는 경고한다. 정보사회의 도래가 정신노동마저 기계로 대체시킴으로써 인류는 노동으로부터 추방되는 낯선 시대의 문턱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변동에 대응하는 노동시간 단축과 제3부문 창출을 그는 대안으로 내세운다.
사회학자 앙드레 고르는 ‘노동’과 ‘임금노동’을 구별한다. 인류가 현재 겪는 것은 상품처럼 팔고 사는 근대적 임금노동의 종말일 따름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화폐로 지불되든 되지 않든 사회 활동으로서의 보편적 노동은 여전히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것이다. 노동력이 과잉 공급되는 노동시장에 대해선 노동시간 단축, 기본소득 보장, 문화사회로의 이행이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그는 역설한다.
최근 제4차 산업혁명의 도래는 노동의 미래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더욱 강화시킨다. 경제학자 에릭 브린욜프슨과 앤드루 맥아피가 ‘제2의 기계시대’에서 강조하듯, 새로운 기술변화는 모든 이들에게 똑같은 결과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 미숙련 일자리는 기계가 대체하고, 자본이 노동보다 더 많은 몫을 차지하며, 재능이 뛰어난 이들이 부를 독점하는 게 우리 시대 미래 풍경을 이룰 가능성이 높다.
노동이 처한 이런 현재적 상황은 고르가 선구적으로 제안한 대안의 중요성을 환기시킨다. 노동시간 단축과 기본소득 보장은 미래적 과제인 동시에 현재적 과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연재입니다. 다음주에는 한완상의 ‘민중과 지식인’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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