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수뇌부에 가려진 5ㆍ18진압 가해자들]
최씨 “군 잘못 밝혀야 당시 군인들도 짐 덜 수 있어
책임자들 승승장구… 일부 동료 나를 배신자로 여겨”
‘5ㆍ18민주화운동에서 군의 양민학살을 인정한 최초의 군인.’
1980년 5월 7공수 33대대 중사로 광주에 투입됐던 최영신(64)씨가 1989년 1월 16일 양심고백을 한 이후 30여년 동안 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166명의 시민이 사망(부상 후 사망자 375명, 실종자 65명)한 5ㆍ18민주화운동 현장에서 군인(최씨)이 직접 계엄군(김 소령)의 시민 사살을 인정한 사례는 지금까지도 극히 드물다. 양심선언 후 최씨는 ‘군의 배신자’라는 동료들의 낙인과 ‘시민을 학살한 계엄군’이라는 비난 가운데 서 있었다. 경기도 부천에서 최근 만난 최씨는 “5ㆍ18민주화운동 40년이 가까운 이제는 진상이 밝혀져 현장 진압에 투입됐던 군인들도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 화합할 길을 찾았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최씨는 1980년 5월 17일 전역을 고작 열하루 남겨두고 광주에 투입됐다. 그의 부대는 무장한 시민군을 피해 주남마을 골짜기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골짜기에 머문 지 이틀이나 지났을까. 24일 새벽 그는 군인들과 함께 골짜기로 온 주남마을 양민학살 사건의 생존자 홍금숙씨와 채수길, 양민석씨를 목격했다. “손수레인지 경운기인지에 세 사람이 타고 주둔지까지 왔는데, 두 남자는 포개져서 누워 있었고, 홍씨는 총알이 관통한 오른손에 붕대를 감고 서 있었어요. 남자들도 멀쩡했고, 한 사람은 계속 살려달라고 애원하더라고요. 밑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어 내려가 보니 주변에 군인 수십 명이 함께 있었어요.” 군인들이 두 남성의 옷 주머니를 뒤지자 담배, 천 원짜리 지폐, 그리고 실탄이 나왔다. 잠시 후 11여단 작전보좌관 김모 소령의 없애버리라는 지시에 따라 군인들이 두 남성을 데리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사살됐다.
“자료를 보니 주남마을에서 버스 집중 사격 직후 앰뷸런스가 왔는데, 의료진이 홍금숙씨의 손만 응급처치하고 그냥 떠난 것 같아요. 그때 생존자들을 모두 데리고 병원으로 갈 수 있었을 텐데…. 지금도 안타까울 뿐입니다.” 당시 현장으로 출동했던 간호봉사원은 사상자들을 전남대병원으로 후송할 것을 요구했으나 공수부대 지휘관들이 이를 거부했다고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진술했다. 최씨는 사흘 후인 27일 다른 제대병력과 함께 광주를 떠났다.
이후 최씨는 대학 교직원으로 일하며, 또 야간 대학원을 다니며 자신이 특전사 출신으로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작전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어요. 나뿐만 아니라 같이 광주에 투입됐던 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거에요. 매년 5월이 되면 대학 학생회에서 주관하는 5ㆍ18 행사의 일환으로 학교 캠퍼스에 광주의 참상을 담은 사진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그걸 볼 때마다 내가 당시 광주에 다녀왔다는 사실 때문에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침묵하던 최씨가 9년만에 양심선언을 하게 된 것은 1988년 열린 제5공화국 청문회에서 5ㆍ18민주화운동 강경 진압 책임을 회피하던 군인들을 목격해서다. 최씨는 “식당에서 밥을 먹다 청문회를 보는데 당사자들이 진실을 감추고는 ‘나는 몰랐다’고만 하는 거예요. ‘이건 아니다, 사실을 밝혀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는 같은 대학원에 다니던 평화민주당 인권위원의 도움을 받아 1989년 1월 16일 평민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었고, 주남마을 현장을 찾아 국회 5ㆍ18진상조사특별위원회 위원들에게 증언을 했다.
최씨는 양심선언 후 “홀가분했고, 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또 자신의 양심선언 후 관련자들의 고백이 이어질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국방부는 최씨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반박했고, 그는 같이 군생활을 한 일부 동료들에게도 배신자로 여겨졌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가 그 때 양심선언 한 것에 대해 잘했다는 동료들이 절반, 싫어하는 동료들이 절반이에요. 경조사 자리에서 만나도 광주 이야기는 금기 사항이죠. 어느 날은 술을 마시고 후배가 ‘도대체 왜 그랬냐’고 묻기도 했죠” 얼마 전 최씨는 동기 자녀의 결혼식장에서 만난 후배에게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주남마을 골짜기에 같이 주둔했던 부하 말이, 당시 홍씨를 이송할 헬기를 부르고 기다리던 상황에서 제가 홍씨에게 ‘배고프냐, 군대 라면도 맛있다’고 하며 자기에게 라면을 끓여주라고 시켰다고 하더군요. 저는 기억에 없는데 라면을 끓인 그 친구는 기억하더라고요.”
최씨는 꽤 오랫동안 국립 현충원과 광주 운정동 국립5ㆍ18민주묘지를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그가 양심선언을 한 1989년 현충일에도 검은 양복을 입고 현충원을 향했다. “현충일이면 광주가 고향이었던 동기 어머니가 제사음식을 푸짐하게 만들어 올라오셔서 동기들과 둘러앉아 먹었어요. 양심선언을 한 해에도 나는 떳떳하다는 생각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현충원을 갔어요. 제가 나타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탓인지 모두 깜짝 놀라더라고요.” 5ㆍ18민주화운동 희생 영령들이 자리한 묘지를 찾을 때마다 그는 ‘이런 일이 또 어디서 벌어질 수 있었을까’는 마음에 침통한 감정이 든다고 말했다.
최씨는 5ㆍ18민주화운동 진압 작전 현장 책임자들이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승승장구했던 현실에 대한 울분도 토했다. “1988년 청문회 기록을 보니 효천역 일대에서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교도대가 11공수여단 63대대에 집중사격 해 공수부대원 9명이 사망하고 40여명의 부상자가 나왔어요. (이후 63대대 병력은 일대를 수색해 집에 있던 마을 주민 4명을 끌어내어 총살했고, 이 사건은 송암동 양민학살사건으로 불린다.) 그런데 전교사 사령관이었던 소준열 당시 전남ㆍ북 계엄분소장은 이들을 시민군이라고 생각해서 공격했다고 답했어요. 모두 우리 국민인데, 계엄군이면 쏘지 않고 시민군이면 쏜다? 그게 말이 되나요? 그런데 소 장군은 예편 후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국유지를 받는 등 최고 대우를 누렸죠.”
최씨는 출범을 앞둔 5ㆍ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 진실이 명명백백히 드러나야 군인으로서의 명예회복이 이뤄질 것이라 말했다. “우리가 이제 60대 중반을 넘어갑니다. 아직도 광주에 특전사로 투입됐던 과거를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40년 전 진압에 투입됐던 군대가 잘못한 부분을 확실히 밝혀야 우리도 과거를 털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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