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도죄는 피해자 동의 없이 처벌할 수 있는데, 폭행죄는 왜 피해자가 원하지 않으면 처벌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경미한 폭행에도 범죄자를 양산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는데, 경미한 절도사범이 양산되는 것은 상관없나. 분식집에서 동전통과 라면 10개를 훔쳤다가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 받은 사례와 같은 소위 ‘장발장법’(상습절도 가중처벌)이 몇 년 전까지 건재(2015년 위헌 결정)했던 것을 보면, 이유는 다른데 있는지도 모른다. 절도는 주로 약자가 강자에게 가하는 범죄지만, 폭행은 반대라는 점. 회사 대표(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가 직원에게, 재벌가 사주(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가 거래처 직원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고객이 점원에게. 우리가 마주하는 폭행은 권력관계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권력관계인 사건에서, 피해자에게 “당신이 원하지 않으며 처벌하지 않겠다”라는 선언만큼 간교한 것은 없다. 피해자에게 선택권을 주는 배려라고? 오히려 “우리 사법 시스템은 당신의 피해에 관심이 없으며, 당신이 안 나서면 아무도 책임지고 가해자를 처벌할 생각이 없으니, 다 잃을 각오를 하고 나서려면 나서고 아니면 내버려 두세요. 귀찮아요”라는 말로 들린다.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기대와 달리, 조현민씨에게 음료수 벼락을 맞은 광고사 직원들은 그의 처벌을 원하지 않았고 조씨는 무혐의 처분됐다. 대통령은 바뀌어도 재벌 사주의 권력은 영원할 것 같은 한국에서 감히 그들을 처벌해달라고 할 거래처 직원이 있을까. 양진호씨 사건에서도 폭행을 문제 삼은 것은 일을 그만둬서 잃을 것이 없는 전 직원이었다.
지난 달 말, 백화점 명품매장에서 직원에게 지폐뭉치를 던진 ‘갑질 고객’에게 폭행 혐의로 벌금형이 선고됐다는 기사가 있었다. 가해자는 동종 전과가 있고, 집행유예 기간이었고, 청각 장애인이었다. 50대의 이 남성은 재판 출석을 미루다 두 달 동안 구속도 됐다. 그 남성과 조현민씨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 남성은 동종 전과가 있었으니 죄질이 더 나쁜가. 조씨 일가도 수없이 비슷한 짓을 저질렀지만 피해자들이 아무도 처벌하길 원치 않았고 감히 수사기관에 알리지도 못했으니 전과가 없었을 뿐이다.
최근 발생한 ‘강서구 전처 살인사건’을 보면, 피해자는 2016년 전 남편 김모씨에게 흉기로 협박을 받고 경찰에 신고했으나 김씨는 처벌 받지 않았다.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 경찰의 설명, 아니 변명(특수협박은 반의사불벌죄 아님)이다. 가정폭력 처리에서 수없이 반복 돼 온 레퍼토리이다. 수십 년간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결국 그렇게 죽어간 아내가 용서해서 처벌을 원하지 않았겠는가. 약자가 강자를 용서할 때는 ‘공포’인 경우가 많다. 피해자는 남편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자신에게 경찰이 “처벌을 원하느냐”고 묻지 않고, 국가의 책임과 권위로 범죄를 범죄로 다뤄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2010년 할아버지와 아버지 등에게 성폭행 당한 소녀에게 판사가 “가족들의 처벌을 원하냐”고 물었다. 나는 그 판사가 저주스러웠다. 소녀의 마음이 약해져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형량을 깎아주고, 용기를 내서 강력한 처벌을 원하면 형량을 올리겠다는 것인가. 이런 질문의 효과는 단 하나. 피해자에게 죄책감을 주고 정신을 더욱 분열적인 상황으로 내모는 것뿐이다. 피해자에게 왜 용기가 없느냐, 권리도 모르냐고 묻는 것 또한 강자의 논리다.
그러니 권력형 범죄의 피해자에게 해야 할 말은 따로 있다. 당신이 용서했던 아니건 가해자는 죄값을 치러야 한다고. 가해자의 손아귀에서 24시간을 보내야 하는 가정 내의 사건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런 시스템이 절대값으로 굳어져야 가해자도, 자신이 상대하는 대상이 쉽게 때리고 칼로 위협할 수 있는 한 명의 약한 사람이 아니라 사회 전체라는 것을 알고 일말의 두려움을 가질 것 아닌가.
이진희 기획취재부 차장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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